대림절 미학: 기다림, 지각, 그리고 낯섦의 재구성
— 빅토르 쉴로프스키 ‘낯설게 하기’ 미학을 기반으로
대림절을 사유의 장치로 읽기
기독교 전통에서 대림절(待臨節)은 ‘오심(coming)을 기다리는’ 특별한 종교적 계절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겨울의 문턱에서 성탄절을 향해 몸과 마음을 정돈하는 절기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 절기는 신앙의 감정이나 경건한 심적 태도로만 축소되는 경향이 짙어져 간다. 소비와 놀이의 계절로 충분하다는 인식도 자연스러워졌다. 그 결과 대림절은 ‘교회 안에서만 통과하는 의례’로 점점 얇아지고, 기다림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의 반복’처럼 자동적으로 처리된다. 이런 경향은 우리가 이미 대림절을 검은 안식으로 끌어들였다는 의미다.
대림절은 사회적 절기이다. 개인적 신앙 의미 역시 소중하다. 하지만, 이 절기가 품은 시간성—기다림—은 종교 내부의 개인 언어로만 가둘 수 없다. 이유라면, 그것이 ‘인간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대림절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믿는 대상이 무엇이든 이 절기는 무엇을 어떻게, 지금 여기에서, 그날, 그 밤, 그 별빛을 지각하며 살아가느냐를 묻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대림절을 종교를 넘어 인문학과 미학의 관점에서 매해 다시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빅토르 쉬클로프스키(Viktor Shklovsky)의 ‘낯설게 하기(ostranenie)’가 좋은 렌즈가 되었다.
자동화와 낯설게 하기 — 지각을 되살리는 형식
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를 대표하는 쉬클로프스키는 예술을 “삶을 주어지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동적 상태에서 지각을 해방시키는 행위”로 보았다. 그가 주장한 ‘자동적 상태’, ‘자동화(automatization)’는 의식하지 않아도 늘 그렇게 받아들이는 익숙한 의식, 행동이다. 따라서 낯설게 하기란 그 ‘자동적 의식’의 해체이다. 의도적으로 지각을 어렵게 만들어 관찰의 시간을 늘리고, 사유의 속도를 늦추며, 의미를 단정하지 않도록 스스로 판단을 지연시키는 형식이다. 그리하여 세계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나의 감각의 결을 달리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에 담긴 무한한 결을 날마다 다르게 살피는 일이며, 늘 보던 자리에서 조금 옆으로 비켜서 보는 일이다. 몸에 밴 방식대로 무심히 행동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세미한 관찰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것이 낯설게 하기에 부합한다.
쉬클로프스키의 자동화 이론은 인간의 감각이 일상에서 무감각해지는 과정을 적확하게 포착한다. 이 자동화된 지각은 사물을 보면서도 더는 신선하게 보지 못하는 상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물은 여전히 내 앞에 있는데, 내 감각이 이미 ‘처리하는 법’을 배워버려 사물을 통과시켜 버리는 상태다. 매일의 식사, 익숙한 출근길, 반복되는 만남, 늘 듣던 말들 속에서 우리는 “보았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통과했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때가 많다.
대림절 역시 자동화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 절기에서 기다림은 습관의 궤도를 따라 진행되기 쉽다. 기도는 반복되고, 성서 본문은 익숙하며, 감정은 미리 정해진 자리로 흘러간다. 기다림이 신앙의 중요한 덕목이 되었기에, 오히려 기다림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말’이 되어버리는 역설이 생긴다. ‘파루시아(parousia)’라는 종말적 기다림이 아니라면 기다림은 더는 의미 없는 행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려는 대상, 만나려는 상대가 나에게로 오는 시간이 지연될 때, 기다림은 종종 사물의 윤곽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낯설게 하기가 필요하다. 낯설게 하기는 자동화된 감각을 파괴하는 기술이다. 다시 말해, 기다림을 ‘그냥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지각을 되살리는 느린 기술로 전환한다. 대림절의 핵심은 기다림 자체가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세계를 어떻게 다시 보게 되는가에 있다.
나는 해마다 돌아오는 대림절이 바로 이 낯섦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대림절은 곧 기다림의 절기라는 고착된 의식, 익숙한 절기 행동, 너무 몸에 배여 어떤 것도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 자동적 태도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굳은 의식에 작은 균열을 내는 것이다.
이 낯설게 하기는 대림절을 ‘처음 만난 절기처럼’ 대면대면하는 머뭇거림과는 다르다. 낯설게 하기는 오히려 너무 익숙해져서 미처 만나지 못했던 대림절만의 고유한 미적 아름다움을 다시 찾아내는 일이다. 결국, 그 미학으로 ‘기다림’이라는 본래 가치를 새롭게 영위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이런 즐거움이 개인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지평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림절에 담긴 미학이며, 나아가 사회적 공동체성이다.
시간 낯설게 하기 : 기다림의 재구성, 느림과 지연의 영성
대림절의 기다림을 낯설게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시간의 감각을 다시 조율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보통 기다림을 “미래의 어떤 순간을 향해 현재를 희생하는 일”로 이해한다. 그래서 기다림은 오지 않았으나 올 것이라는 막연한 시간이며, 비어 있고, 무력하며, 삶을 잠시 멈추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낯설게 하기는 이 기다림을 ‘현재를 비우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를 두껍게 만드는 방식’으로 바꾼다. 두껍게 한다는 것은 주어진 시간의 사이를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하루 24시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으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24분은 어떤 것을 거의 제대로 할 수 없는 시간이라 여기는 일이 많다. 하지만, 24분 안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지, 어떤 일이 생성 소멸하는지 한번 천천히 들여다본다면, 의외의 이 시간이 무한한 두께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의 미분은 곧 변화의 축적이다.
한편, 예술에서 낯설게 하기는 그 대상의 변화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훅 지나가려는 것을 슬로모션으로 관찰하게 만들고, 의미를 즉각 파악하려는 습관을 지연시키기도 한다. 예술의 관점에서 대림절도 마찬가지다. 기다림은 “빨리 끝나길 바라는 시간”이 아니라 “느리게 깨어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도의 리듬을 조금 늦추고, 익숙한 성서 구절을 서둘러 ‘설명’하고, 해석하기보다 생각 안에 ‘머무르게’ 하며, 하루의 시간표 속에 고요한 자기 만의 시간을 넣어두는 일들이 그렇다. 그 미미한 지연, 시간의 미분이 굳어버린 의식의 자동화를 흔들고, 궁극적으로 죽어버린 기다림의 의미를 다시 살게 하는 변화의 시간으로 바꾼다.
사건 낯설게 하기 : 성서적 사건을 감각-지각적 사건으로 바꾸기
낯설게 하기는 대림절의 기본 구조에도 직결된다. 대림절은 해마다 우리를 1세기 초의 어느 공간으로 데리고 간다. 알려진 대로 그곳은 베들레헴이라는 한적한 마을, 어린아이가 태어났다는 마구간이다. 그 공간 밖에는 천사들의 노래, 별, 선물, 목자, 어둠 같은 것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드라마로 만들기 좋은 소재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이 상징들은 이제 아주 익숙해져서 오히려 나의 감각이 무뎌졌다. 그래서 대림절은 종종 ‘역사적 정보, 사실만을 복습’하는 시간이 될 때가 많다.
하지만 대림절의 핵심은 이런 역사적 정보의 반복적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대림절은 성서적 사건—그리스도의 오심—을 인간의 감각-지각에 투사하는 인간의 사건으로 전환하는 운동이다. 사람들은 자기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들을 새롭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것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받아들이려고 한다. 여기서 “처음처럼”은 첫 감정이 아니라 첫 기술이다. 즉, 어리숙하고, 선뜻 판단하지 못하는 갈등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를 해결하고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아니 오랜 시간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 시점을 바꿔야 하고, 거리감을 조절해 초점을 다시 맞춰야 하며, 익숙하지 않은 것을 실수를 거듭하며 반복해서 다뤄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대림절의 경우라면, 처음처럼은 다양한 상징에 대한 자동적 해석을 잠시 보류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말구유를 “가난함”이라는 교훈으로 즉시 환원하지 않고, 그 공간의 냄새와 온도, 어둠과 숨소리, 그 거처가 품은 사회적 위치를 상상 속에서 자기 몸 안에 오래 머물게 한다. 별을 “인도와 상징”이라는 의미로 곧장 닫아버리지 않고, 어둠 속에서 밤하늘이 보여주는 방향지시만 따라가는 그 순간의 떨림과 불안, 길을 잃을 가능성 자체를 함께 붙들어 둔다. 이 지연이 낯섦을 만들고, 낯섦이 익숙한 것들에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는다. 어쩌면 하늘의 계시가 처음처럼 다시 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용 낯설게 하기 1 — 언어: 말씀과 시(詩) 사이, 문학적 형식으로 낯설게 하기
이제 우리에게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낯설게 했다면, 다음으로는 이 대림절을 우리 시대에 낯설게 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자. 대림절이 감각-지각적 사건이라면, 그 사건이 가장 먼저 실체를 띠고 우리 삶에 다가오는 방식은 언제나 ‘언어’이다. 따라서 대림절의 자동화는 이 ‘언어 관습’과 긴밀하다. 특히 대림절에 들려오는 성서 본문과 많은 교회(특히 방송)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언어는 대체로 자동화되어 있다. 주제는 엇비슷하고, 방식은 익숙한 장르를 따른다. 사람마다 강조하는 리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는 ‘평화, 희생’으로 귀결할 때가 많다. 더 자주 내면을 다독이는 말, 경건을 독려하는 말, 위로와 성찰을 촉구하는 말이 쏟아진다. 사실 이 언어와 주제가 해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익숙하게 되어 자동화의 통로가 되어버렸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이 절기에 적용할 낯설게 하기는 바로 언어 자체다. 쉬클로프스키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의미를 즉각 전달하려는 욕구를 일부러 비틀어 보는 것이다. 산문보다 짧고 분절된 문장으로 시를 써보는 것도 그 한 방식이다. 문장이 짧아지면 의미는 즉시 닫히지 않고 여백을 남긴다. 오랜 의식 속에 유영하듯 체류한다. 그 여백은 굳은 생각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사이(間)의 미학’도 중요하다. 문장에서 서술어를 과감히 생략해 명사만 남겨두는 것이다. 평서문을 질문형 문장으로 바꾸어 사람의 내면을 호출해 내는 방식도 좋다. 그것은 의미를 독점하지 않는 좋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읽는 이가 스스로 의미를 채우게 만든다.
끝으로 명명(命名)이다. 이것은 강력한 낯설게 하기다. 예를 들어 내가 ‘꽃비글’이라고 쓴 글이 있다. 이 새로운 명명은 서로 멀어 보이는 단어들을 결합해 새로운 개념을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각각 다른 사물은 하나의 틀 안에서 전혀 이질적인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미지-언어-사유의 삼중 구조가 작동한 것이다. 즉, 사진과 시와 산문이 서로를 끌어올려 하나의 사건을 창발 한 것이다. 꽃비글은 한 편의 글이 봄날 꽃처럼 내리는 비로 상징화되었다는 의미다. 글이 꽃과 비처럼 내리는 것을 상상한 것이다. 그때 글에 대한 자동화된 나의 의식에 미세한 지각 변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하다.
적용 낯설게 하기 2 — 문화: 대림절 실천을 낯설게 하기, 식탁과 공동체의 형식
대림절은 하나의 신앙적 예술 행위다. 문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다림을 통해 삶의 시간을 천천히 늘려보는 기교로 성취되는 영성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낯설게 하기는 대림절을 보내는 문화적 양상에도 적용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대림절의 고유한 문화가 있었다. 11월 말이 되면 어스름한 저녁에 교회에 모여 트리를 만들고 장식하며, 선물을 나누고, 캐럴을 부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런 행동도 반복 속에서 자동화되어 버렸다. 그런데 낯설게 하기는 이 자동화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질문이 바뀌면, 행동의 방향도 바뀐다. 따라서 대림절 문화를 낯설게 한다는 것은 그 장식을 그만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장식에 대해 질문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새 양식으로 전환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림절 4주간에 매주 고유한 ‘빵/떡’을 나누어 보는 일은 기다림을 식탁의 형식으로 번역한다. 첫째 주에는 슈톨렌, 둘째 주에는 파네토네, 셋째 주에는 우리의 팥시루떡. 그리고 베들레헴—떡의 집—이라는 상징을 생활의 언어로 되살린다. 더 나아가 성탄절에 점심을 제공하지 못하는 사회 시설을 찾아가 떡국을 나누는 일도 가능하다. 선물을 ‘받는 기쁨’으로만 두지 않고, ‘주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처럼 적용을 낯설게 하기는 결국 대림절이 하향성의 절기이며, 식탁 공유의 절기이며, 공동체성의 절기임을 내 몸의 문화로 드러내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대림절은 시간을 기다리는 절기이지만, 누구도 기다림의 절실함을 몸으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그 기다림을 표현하는 형식을 낯설게 할 때 내 몸의 문화도 새롭게 성장할 것이다.
적용 낯설게 하기 3 — 질문: “당신은 왜 그를 찾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대림절의 적용에서 낯설게 하기는, 이 절기에 담긴 궁극적 질문을 각색해 보는 것이다. 흔히 이 절기를 관통하는 질문은 “신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이다. 성육신(成肉身)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데 이 익숙한 질문을 낯설게 바꾸면 이렇게 된다.
“당신은 왜 그를 찾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대림절이 나아가는 의미의 방향을 뒤집는다. “그가 오셨다”라는 존재론적 진술에서 “너는 그가 어디 계셨는지 아는가”라는 인식론적 물음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 이동은 단지 사유의 이동이 아니라 지각의 이동이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에서 ‘찾아 나서는 사람’으로 옮겨간다. 대림절이 대탐절(待探節)이 되는 순간이다.
쉬클로프스키적 관점에서 이것은 방향의 자동화를 파괴하는 장치다. 지도 없이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사람, 정해진 길을 한 번도 거스르지 않는 이에게 그 똑같은 길을 낯설게, 새롭게 달리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길을 바꾸지 않고, 그 풍경을 달리하면 가능하다. 질문은 대림절의 배경을 바꾸는 일이다. 길 주변이 바뀌면, 그 길마저도 새롭게 보인다. 대림절의 배경을 각색하면 나는 기다린다는 주제가 나는 찾는다라는 의미로 변환된다. 다시 말해 내가 무엇을, 어떻게, 왜 지각하고 있는지를 다시 점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다림을 미래로 도피하는 수단으로 만들지 않고, 현재 바로 여기에 침투하게 한다. 기다리던 그를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만나기 위해 찾아가야 한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대림절이 어둠 속에서 그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대탐절이 된다.
결론: 대림절을 현대적 미학으로 이해하기
대림절은 단순한 종교적 기다림의 계절이 아니다. 쉬클로프스키의 미학에 기대어 보면, 대림절은 자동화된 인식을 깨우고 재구성하는 절기가 될 수 있다. 시간의 속도를 늦추고, 사건을 정보가 아니라 감각으로 다시 경험하며, 언어를 형식적으로 실험하고, 문화적 실천의 방향을 바꾸고, 질문을 전복하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술이 수행하는 기능—세계의 자동적 지각을 해체하고 사물과 시간과 말과 이미지의 감각을 되돌리는 행위—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그래서 대림절 미학이란, 기다림의 시간 안에서 익숙한 세계를 다시 처음처럼 보게 하는 지각적·언어적 재구성의 장치다. 낯섦은 사유를 일으키고, 사유는 삶의 형식을 바꾸며, 그 형식은 다시 공동체의 감각을 조율한다. 대림절은 과거와 미래의 도식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사이의 보이지 않는 현재를 더 미세하게 드러내는 예식이 된다. 개인의 영성에서 사회적 영성으로, 익숙한 행동에서 낯선 감각으로 이동하는 계절이다. 정적이면서도 동적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다시 나의 ‘검은 안식’을 떠올린다. 대림절의 목적은 어둠을 단번에 걷어내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어둠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빛을 감지하는 감각을 회복하는 데 있다. 어둠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감각이 깨어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존재의 배경이 된다. 대림절의 기다림은 침묵 속에서 그를 찾아 나서는 일과 닮아 있다. 요컨대 대림절은 느림, 회복, 전망이라는 단어가 선물보다 더 어울리는 절기이다. 자동화된 의식을 낯설게 함으로써, 과거의 미래로만 이해되던 시간을 ‘여기에서’ 새로운 결을 찾아가는 현재의 예식으로 바꾸는 절기이다. 당신의 대림절은 어떤가.
“당신은 왜, 그를 찾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