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의 사회적 책임
우리 시대의 균열에 대하여

사순절 47일 묵상을 마치며

by 푸른킴

I. 나의 추억


부활절 아침입니다.

47일간, 그리고 오늘 부활절 마지막 날까지, 사순절 산책은 고난 속을 즐겁게, 고난과 함께 걷는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은 다 ‘찼습니다.’ 누가 어떤 이유로 정했든, 지난 40여 일과 그 사이를 지나간 여섯 번의 주일 동안,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나의 ‘청년 예수’를 기억하고, 그의 말을 돌아보고, 또 그의 손길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해야 할 일들을 다 하면서, 누릴 것들을 또 다 누리면서 지나온 시간이었기에, 이 시간을 두고 무언가 대단한 말을 붙인다는 것은 어쩐지 쑥스럽기도 합니다.


절기란 결국 시공간의 이야기입니다. 절기의 시간은 기차선로처럼 앞으로만 직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통의 안과 밖을, 그 표면을 따라 휘감아 돌면서 삶의 작은 조각들을 차곡차곡 채워 가는 시간에 가깝습니다. 절기에는 늘 그것을 빛내 주는 고유한 의식과 핵심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해도 그것이 빠지면 왠지 어색한, 바로 그 중심 같은 것이 있습니다. 설날에 떡국이 그렇고, 추석에 송편이 그러하며, 크리스마스에 손편지와 선물이 그러하고, 부활절에 계란과 토끼 그림이 그러하듯, 사순절이라는 이 긴 절기에도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그것은 ‘금식과 절제’ 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덕목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전통 안에서 너무도 중요하게 다루어져 온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전통에 늘 의심을 갖습니다. 심지어 40여 일 동안 ‘금식과 절제’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그리 많지도 않습니다. 아니, 나의 삶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일 것입니다. 생업에 종사해야 했고, 학교와 교회, 가족들을 돌보아야 했고, 세계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동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은 쉼 없이 나의 금식과 절제를 흔들고, 나를 그 현장으로 이끌어 갑니다. 달리 말하면, 조금이라도 식사를 해야 몸을 유지할 수 있었고, 손에는 늘 스마트폰이 들려 있어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으며, 페이스북과 블로그 같은 SNS를 통해 아침저녁으로 나의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책도 읽었고, 적어도 하루 두 끼 이상은 먹었고, 커피 같은 음료도 거르지 않고 혼자, 또는 함께 마셨습니다. 어떤 날은 사순절이라는 시간조차 잊고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덕목’이라는 기준으로만 본다면, 나의 이 절기는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올해 사순절은 공교롭게도 설날 연휴 마지막 날에 시작했습니다. 어느 해에는 부활절이 프로야구 개막과 맞물리기도 했습니다. 가족들과 행복한 마음으로 명절의 절기를 보내고 느닷없이 금식과 절제의 날로 들어서야 하는 어색함, 야구 개막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들이 표를 예매한다고 했을 때 평소와 달리 선뜻 내키지 않아 부활절의 거룩함을 내세워 몇 번 이런저런 말을 돌려 보았던 추억들이 모두 생경합니다.


오늘날 부활절은 오래전부터 그 자체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있어 만났던 장애물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개신교 자체가 직면한 공공적, 사회적 장애물입니다. 무엇보다 시대와 동떨어져 가는 ‘고난의 신성화’가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 자신에게는 고난 자체가 곧 삶이었습니다. 삶 중 어느 한 요소이거나, 극복해야 할 대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은 대항과 대조, 저항과 부딪힘으로 인한 고난 그 자체였습니다.


사실 그는 굳이 하지 않으면 겪지 않을 삶의 생채기를 스스로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생채기가 만들어 낼 것을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가이사의 나라’, ‘유대 지도자들의 규범’에 대한 저항이라고 자기 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에게 고난주간은 삶의 전부였지, 삶에서 조금 덜어 낸 ‘고난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에게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 며칠간의 극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 역시 그의 삶 전부를 농축한 응집의 시간이었지, 별도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주어진 길, 곧 운명이었습니다.


그 운명 같은 시간 안에 그는 인간의 웃음과 슬픔, 절망과 소망, 열정과 냉정,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 치열한 논쟁과 포용, 거침없는 외침과 침묵, 사물과 사람, 죽음과 삶이 가장 뚜렷하고 극명하게 맞부딪히는 장면들을 모두 비장하게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결국 영원한 삶으로 수렴해 주었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 점을, 특히 고난주간에 집중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은 분명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즐기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가 돌아가신 날, 어떤 그리스도인은 평소보다 더 비싼 식사를 하며 보낼 수도 있습니다. 더 즐거운 오락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낼 수도 있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즐기며, 평소에 하지 못한 즐거운 일들을 하며 지낼 수도 있습니다. 성금요일 기도회를 마치고 웃으며 집으로 갈 수도 있고, 예수의 장례 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더 바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평소 자신이 겪었던 고통보다 더 심하고 난해한 어려움에 봉착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어느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마음 졸이기도 하고, 내 삶이 안전할지 예상할 수 없는 불안감에 하루하루를 지낼 수도 있습니다. 부활이 삶을 자유하게 하기보다 더 심한 올무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사실 나 역시 내 일에 더 바빴고, 그리스도의 고난은 대부분 나의 사색 안에만 머물렀던 적이 많습니다. 기독교 자체가 스스로 만들어 낸 수렁에 빠졌는데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런 언어의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비판거리입니다. 그렇게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그 고난을 내 삶에 체득하지 못한 순간들도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렇게 지난 40여 일 동안 나와 세계는 옷을 풀어헤쳐 죄를 자복하지도 않았고, 먹을 것을 다 집어던져 자신을 핍절하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미디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광야로 가지도 않았고, 생업을 손에서 놓지도 않았습니다. 성금요일 점심시간의 신학교 주변 식당이 오히려 더 붐비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나 역시 그런 일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있는 이 넌센스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묻곤 했습니다. 이렇듯 나는 겨우겨우, 아주 작은 분량만큼만 그런 일들을 사색하며, 대체로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 절기가 한동안 불편했습니다. 안 지키자니 정체성의 문제 같고, 하자니 몸에 맞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눈을 생각하며 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평상시에 하지 않아도 전혀 문제없는 일들을 금식하고, 정말 금식과 절제를 해야 할 본질적인 일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 덕목과 거리를 두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 절기는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절기의 핵심은 ‘금식과 절제’ 그 자체가 아니라고 해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성령’이 이루어 내는 사회적 삼위일체의 삶을 나의 삶의 방식으로 몸에 익히는 일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서에서 보여 준 삶의 방식을 나와 세계 속에서 공공의 윤리로 새롭게 각인하는 데 있었습니다. 비록 교회 전통의 정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나만의 이해라 하더라도, 사순절은 예수님처럼 ‘함께 있고 나누는’ 삶의 방식을 교회 안을 넘어 교회 밖으로 들고 나와 더 깊이 훈련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새벽, 고요한 시간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아 따뜻한 차 한잔을 손에 쥐고 있으면, 거창한 결심보다 먼저, 누군가와 함께 버티는 하루가 믿음의 모양일 수 있는지 떠오릅니다. 그런 시간이 축적되어 올해도 한 가지 사실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 동안,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그리스도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버겁고, 짜증이 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이게 대체 무엇을 하는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고, 외식적인 일처럼 보이며, 무겁게 느껴지던 모든 순간들 속에서도, 이 절기는 ‘예수가 보여 준 이야기들을 따라 그의 삶을 읽어 내는 시간’이라는 것을 되새겼습니다. ‘예수 바로 곁에서 함께 움직여 보려고 애쓴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다른 일상과 함께하는 훈련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 힘겨움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내가 ‘더 좋은 일’을 선택했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평소 네 시간짜리 묵상이었다면, 이 사순절에는 열네 시간, 스물네 시간을 감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궤적을 따라 함께 갈릴리를 성지순례하듯 삶의 둘레를 돌았습니다. 마침내 예루살렘에 들어가 삶을 어떻게 마감해야 하는지도 다시 세밀하게 배웠습니다. 투사는 아니어도, 마치 죽어도 산다는 확신과 산 경험을 감수하려는 사람처럼 이 절기를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래도 최선을 다해 그곳에 근접하려 했습니다. 여기까지 잘 왔습니다.

그렇게 올해 2026년에 다시 만난 사순절은 어색할 정도로 특별했습니다.
삶의 자리는 먼 곳에서부터 전쟁 소식에 지축이 흔들렸고, 밤을 낮처럼 밝히는 포탄이 난무한 세계를 영상으로 보며, 내 삶이 유지될까, 필수품이 동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시대를 ‘놀이하듯 향유’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의 두려움과 공포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느슨한 두려움이 되고, 널널한 공포가 된다는 것이 어색합니다. 세계는 거리가 사라진 하나의 공간 안에 살아간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물리적 환경에서만큼은 무한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았습니다.


이런 시대에, 그 옛날 경계를 넘어 삶과 삶의 자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기 몸으로 엮어 냈던 예수는 여전히 그리운 존재였습니다. 그를 만난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나는 그분 때문에 힘들기도 하고, 배도 고플 것이고, 괜한 낭비에 버럭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루 대부분을 시간 죽이기에 썼을지도 모릅니다. 멍하게 있기도 하고, 집요하게 고민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일에 몰입하기도 하며, 웃기도 하고 내 일에 몰두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돌아보니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특별히 내가 사는 세계에 어떤 결정타를 남기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에도 내게 “함께해 주어서 고맙다”, “더 즐겁게 해 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길 것입니다.


II. 묵상의 주제: 십자가 위의 일곱 개의 말


올해 47일의 묵상은 한 사람의 죽음을 ‘종결’로 읽지 않고, 오히려 세계의 질서가 다시 짜이는 ‘전환’으로 읽어 내는 여정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말들은 단지 위로의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욕망, 곧 네페쉬에 포획된 인간과 힘을 숭배하는 제도, 합법을 가장한 폭력, 소리로 이기는 군중의 세계를 향해 열리는 균열이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는 가장 인간다운 결핍의 고백으로, “다 이루었다”는 창조의 잠정적 멈춤이 마침내 죽음 안에서 완성되는 선언으로, “아버지,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는 자기 전권을 내려놓는 검은 안식의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말하는 검은 안식은 무기력한 포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힘을 빼는 신뢰’입니다.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처럼, 경계와 성역과 특권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멈춤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증명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서 고백과 신뢰로 열리는 원시정원 같은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죽음에 저항하는 용기를 길러 내는, 비밀의 생명 같은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늘 “다 이루었다”를 강요합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정확히, 더 효율적으로. 이 문장들은 성취를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나의 숨을 빼앗는 채찍이 되곤 합니다. 완료는 축복이 아니라 검열이 되고, 결과는 삶의 자격증이 됩니다. 실패는 곧 죄가 되고, 느림은 낙오가 되며, 멈춤은 무능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자주 말합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가리기 위해 더 큰 소리를 냅니다. 소리는 늘 이긴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승리의 소리 한복판에서 다른 것을 들으려 했습니다. 소리보다 먼저 도착하는 침묵입니다. 아니, 침묵보다 더 크게 울리는 눈빛입니다. 나아가 눈빛보다 더 많은 역사를 말하는 손의 떨림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나는 ‘말’을 기록하는 동시에, ‘말이 기록되지 못하는 자리’를 정직하게 남기려 합니다. 글이란 화석이고, 그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과 손과 눈을 붙들고 싶습니다. 이것은 단지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나의 윤리적 선언입니다.


창가에 기대면 바깥의 소음은 조금 늦게 들어옵니다. 그 짧은 틈에서야 비로소, 무엇이 말이고 무엇이 소음인지 가늠하게 됩니다. 하여 나는 소음을 의미로 착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는 데이터와 증명으로 인간의 깊이를 다 계산해 낼 수 있다고 믿지 않으려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잃어버린 것은 보는 능력, 기다리는 능력, 들리지 않는 고통의 리듬을 알아채는 능력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 감각의 회복을 꿈꿉니다.


나에게 ‘힘’은 단지 물리적 우세가 아닙니다. 힘은 경계를 긋는 기술입니다. 합법과 비합법의 선을 자기 입맛대로 그어 버리는 기술입니다. 인간이 만든 규범이 스스로를 ‘만고의 가치’로 포장하는 순간, 힘은 가장 매끄럽게 폭력이 됩니다. 이 폭력은 칼과 몽치만이 아니라, 판결과 절차와 여론과 숫자와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도 작동합니다. 나는 그것을 ‘합법을 가장한 비합법’, 곧 제도화된 폭력이라 부릅니다. 권력은 언제나 자신의 언어를 진리처럼 보이게 만들고, 나는 그 언어가 주는 편안함에 너무 오래 길들여져 왔음을 고백합니다. “나의 노력 부족”, “나의 판단 착오”라는 말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논리에 이제는 저항하고 싶습니다.


십자가의 말들은 이 언어를 거꾸로 돌려세웁니다. “내가 목마르다”는 말은 위대한 신학적 문장이기 이전에, 결핍을 인정하는 몸의 언어입니다. 우리 시대는 결핍을 수치스러운 약점으로 치부하여 숨기라고 가르치지만, 나는 그 목마름을 숨기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계의 진실이 오히려 고통 속에서 더 선명하게 말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계적 삶이 빼앗아 간 인간의 속도, 숨과 숨 사이가 길어지는 진짜 시간을 되돌려 놓고 싶습니다. 죽음을 관리 항목이나 제거 가능한 오류로 취급하는 현대 문화에 대한 저항으로서 말입니다. 삶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에야 비로소 삶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말씀, “다 이루었다”는 나에게 날카로운 철학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말을 업적의 완료로 읽지 않습니다. “내가 이뤘다”는 능동이 아니라,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이것은 “내가 했다”로 자신을 세우고, “내가 관리한다”로 불안을 덮으려는 자기중심적 주체 신화를 흔드는 장면입니다. 내가 말하는 ‘검은 안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납니다. 통제를 내려놓고 전권을 건네는 결단, 생산성의 윤리에 대한 반란, 자기 착취의 고리를 끊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는 문입니다.


잠깐 불을 끄면 방 안의 사물들이 제 윤곽을 늦게 드러냅니다. 나는 그 느린 드러남을 믿고 싶습니다. 너무 빨리 해석된 것은 대개 너무 빨리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손’을 바라봅니다. 빵을 떼어 내어 주고, 발을 씻기며, 때로는 거부하고 다시 내어 주는 그 손을 봅니다. 오늘날 손은 화면을 스치고 클릭할 뿐, 사람을 어루만지거나 책임을 짊어지는 법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붙들고 싶은 손의 세계는 공동체의 복원을 꿈꿉니다. 교회는 단순히 삶을 향유하는 동아리가 아니라, 취약함을 함께 견디는 구조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죽음을 공유하는 공동체만이 타인을 위협하지 않는 윤리를 세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침내 일곱째 말씀, “아버지,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에 이르러 나는 나 자신을 네페쉬, 곧 욕망의 존재로 읽게 됩니다. 불안과 비교를 동력 삼아 달리는 시대에, ‘부탁한다’는 말은 무능이 아니라 지극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내가 부르는 검은 안식은 여기서 완성됩니다. 어둠 속에서 멈추는 일,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세계가 새로 짜이는 일. 이것은 속도에 대한 저항이며, 오만한 주체의 해체이며, 성과보다 존재가 앞서는 자리로의 복귀입니다.


부활에 대해서도 나는 그것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으려 합니다. 부활은 논쟁의 재료가 아니라 나의 비밀정원이기 때문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배척하는 시대에, 사랑과 신뢰 역시 설명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나의 부활은 그래서 사회적 선언이기도 합니다.


나는 소리로 이기는 방식으로 살지 않겠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먼저 믿고, 그 믿음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저항하겠습니다. 이 고백은 내밀하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윤리로 확장되어야 할 고백입니다. 비밀정원은 도피처가 아니라, 다시 길로 나가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바닥의 야생화를 엎드려 들여다보며 현실이 빼앗아 간 생명의 감각을 되찾고 싶습니다. 위보다 아래를, 속도보다 숨을, 성취보다 관계를 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달려왔는가. 무엇을 진리라 우기며 누구의 목마름을 외면해 왔는가. 그리고 끝내, 나는 어둠 속에서 멈출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검은 안식입니다. 검은 안식은 나의 멈춤의 철학입니다. 삶을 포기하는 멈춤이 아니라, 삶을 다시 살리기 위한 멈춤입니다. 빛이 씨앗이 되어 죽는 자리에서 싹이 돋아나는 질서를 믿는 멈춤입니다. 그 멈춤이 가능할 때, 나는 비로소 다시 갈릴리로 달릴 수 있습니다. 욕망의 존재를 내던지고, 타인을 죽음으로 몰지 않으며,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도 저항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III. 다시 부활이라는 고난의 길


합리주의자 빌립, 초정상의 삶으로

이번 사순절 묵상의 주인공은 빌립이었습니다. 최대의 합리주의자 빌립이 겪은 사순절을 나도 따라가 보고 싶었습니다. 빌립에게도, 나에게도 끝은 곧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늘, 검은 안식의 자리에서 조용히 태어납니다. 사순절의 끝, 그리고 부활절. 이제 나는 더 미세한 길을 가려합니다.


햇살은 하루 종일 무척 따사로웠습니다. 새벽 이른 공기도 좋았지만, 아침의 따뜻한 바람에서 시작해 낮과 저녁으로 이어지던 이 부활절의 경쾌한 리듬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침,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이 유월절이 지나자마자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다녀온 일은,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을 안겨 주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이른 새벽 몸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다시 그 무덤을 부끄럽게 만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간절한 기대를 품고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리라는 확신은 잠 속에 묻어 둔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현실 속에서 다시 아침을 맞고, 점심과 저녁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베드로였겠지만, 내 눈에는 빌립이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마의 의심스러운 눈빛이 예수님의 손을 향할 때에도, 디베랴 바다에서 베드로가 사랑의 대화를 나눌 때에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줄 때에도, 빌립은 그들보다 더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잠시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 그는 말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자신이 끌리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의 온몸에는 그분의 눈빛이 흘러들었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삶의 기록들이 다시 첨삭되고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안과 밖에 농축되어 있던 삶의 찌꺼기들이 모두 털려 나가는 것 같은 해방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의 짧은 이야기가 던져집니다.


“발밑에 놓인 보일 듯 말 듯한 야생화를 엎드려 들여다보아라. 그리고 내가 부활했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타당한 이유를 찾아 증명하려 하지 말아라. 이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여라. 나의 부활은 네가 신뢰하며 받아들여야 할 일이지, 다른 이들을 설득해야 할 주제가 아니다. 나의 부활을 너의 합리적 판단의 밑바닥에서 받아들이지 말고, 너의 온몸으로 받아들여라.”


그 순간 빌립은 자신의 손이 풀리고, 자신을 지탱해 온 삶의 마지막 중심고리가 맥없이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해방되었습니다.


그런 빌립을 보고 있으니 내가 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갈릴리로 갈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과 예전에 다 하지 못했던 즐거운 놀이와 이야기들을 다시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마지막으로 부탁하실 것이 있다면, 그것을 잘 새겨들어 두려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분의 길을 걷는 것이고, 그분의 이야기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풀과 나무와 꽃과 사람들 안에 담겨 있고, 낮은 자리에서 약한 채로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보낸 긴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시간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나는 예수의 가장 가까운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살았습니다. 내가 본 것은 그분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지냈던 친구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나도 연약하고 부족함투성이었지만, 나의 친구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온몸에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채워졌고, 지난 3년 동안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모두 되살아났습니다. 의심과 질문, 확인할 수 없는 답답한 기적들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방황을 하던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예수님의 길이 무엇인지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땅바닥을 훑어가며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미련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 위에 뿌려진 사랑의 씨앗들이, 이제 우리의 손으로, 또 우리의 발걸음으로 온 땅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쪽에서 아까부터 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빌립이 솟구치듯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문과 한 걸음 떨어진 방 한쪽 벽의 창가 쪽으로 다가섰습니다. 그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이사야 53장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분명 그는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는 구절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의 그 구절이 도망자의 길이었다면, 오늘의 그 구절은 순례자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외롭지만 꿋꿋하게 걸어가야 할 길로, 다시 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빌립은 조용히 가방 하나를 챙겨 들고 문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떠나려는가 생각하는 사이, 그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왔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나도 그를 향해 눈웃음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 다시 만나자.
지금-여기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때였습니다. 닫힌 문틈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낀 것은. 그 바람은 아주 오래전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와 함께 온몸으로 느꼈던 따뜻한 바람 그대로였습니다. 요한은 주머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이 모든 상황을 한 문장으로 남겨 둡니다.


“부활은 논쟁이나 설명, 증명의 책임이 있는 현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 확증과 신뢰와 고백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드러나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여 고난주간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마칩니다. 이번 고난주간에는 특별히 합리적인 성향의 빌립을 더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의 공과를 따지기 전에, 그가 보여 준 몇몇 태도 안에 함축된 이 합리성이라는 것이 오늘의 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를 묻고 싶었습니다. 모든 글의 전개는 빌립에 대한 흔적을 남겨 준 요한복음을 염두에 두면서, 동시에 마가복음의 기록들을 따라가며 읽었습니다.


사순절의 글은 곧 내 몸에 떨어져 나온 분신입니다. 이 글쓰기를 마치고 나니, 내게 남겨진 기억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초합리적 삶’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중심적으로 계산하는 삶이 아니라, 상황을 넘어설 만큼 타인을 친절과 배려 속에 안내하는 타인중심적 삶 말입니다. 그것이 버거운 주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는, 다시 나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주어진 과제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사순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세계는 여전히 악의 선물을 뿌리칠 수 없는 유혹과 욕구로 넘실대지만,
그래도 행복한 시간입니다. 부활절, 전쟁부터 끊어지길,
전쟁의 버튼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파멸되길.

사순절과 검은 안식의 시학

그리고 이제 다시 나는 검은 안식의 시학 앞에 조용히 서려합니다. 검은 안식은 빛이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빛이 씨앗처럼 묻혀 있는 자리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밤이 가장 깊은 문장을 품고 있듯이, 멈춤은 공백이 아니라 다음 생명을 준비하는 문법입니다. 나는 이 어둠을 두려움의 색으로만 읽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너무 빨리 말해 버린 것들, 너무 쉽게 단정해 버린 것들, 너무 성급히 승리라 불렀던 것들을 조용히 내려놓는 시간으로 읽고 싶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사물들은 여린 빛만으로도 제 윤곽을 천천히 드러내줍니다. 나는 그 느린 역동을 믿고 싶습니다. 부활은 그 검은 침묵을 지나온 자에게만 들리는 가장 낮은 음성일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의 글도 끝내 환호보다 숨에 가까워지기를 바랍니다. 소리보다 먼저 떨리는 눈빛이 되고, 주장보다 오래 남는 손의 온기가 되고, 한 시대의 상처 위에 가만히 내려앉는 작은 바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끝내, 이 모든 묵상의 마지막 문장은 하나의 시처럼 남기를 원합니다. 죽음 한가운데서도 삶은 비밀스럽게 자라나고, 어둠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은 조용히 세계를 다시 쓰신다는 것. 그것을 따라 나도 나의 글을 시대에 남기려 합니다. 그것이 내가 이 이해불가하고, 불확정적인 시대에 신의 통치를 드러내기 위해 끝내 붙들고 싶은, 검은 안식의 시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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