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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명의 관객 Jun 27. 2024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고백

하야오는 언제나 이곳에 서서 꿈을 꿀 수 있었다.

1. 왜인지 캐롤(2015. 토즈헤인즈)이 떠올랐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만나지 못한 상대의 시간을 절실히 상상하는 일이다. 오직 필멸의 존재만이 사랑할수 있다. 불에 타 죽어버린 어머니를 불꽃 소녀 ‘히미’로서 다시 만나게 된 소년 ‘마히토’는 절실히 상상하는 사람이고 필멸의 존재다.  

2. 전쟁을 배경으로, 전범국가인 일본의 소년을 내세우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비판하는 지점의 질문을 피할 수 없다. 하야오의 전작 <바람이 분다>에서 전쟁 미화로 인해 관객들이 표한 거북함과 따가운 눈초리를 회피하였기에, 이번 작에서 관객들이 팔짱을 끼고 어디 한번 보자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반전주의에 대한 도덕적 메시지나 참회를 담은 우화가 되기보단, 왜가리와 펠리컨, 거대한 앵무를 그로테스크한 주체들로 등장시켜 제국주의의 폭력을 암시한 뒤 이내 훨훨 날려 보낸다. 역사의 과오가 명백한 시대를 다루면서 영화의 태도는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 장엄한 질문과는 다르게 매우 개인적인 서사가 된다. 이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야기다. 


4.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와중, ‘마히토’라는 소년이 있다. 마히토의 아버지는 군수 산업을 운영하고 있고, 어머니는 불에 타 죽게 되어 새어머니 나츠코와 함께 산다. 이 소년은 미야자키 하야오다. 그러니까 하야오는 이런 거대하고도 민감한 질문을 대답하려면 먼저 어머니의 죽음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소년에게는 전쟁으로 인해 피 흘리는 이들의 절규보다 어머니의 상실이 먼저 찾아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극단적 낭만 추구로 전쟁을 미화하려 했던 전작에 대한 반성도, 그에 대한 대답도 아니다. 이것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악의 없는 세계를 창조해온 인물이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가장 내밀한 한 켠의 어스름을 해부하여 꺼내 보이는 해체쇼다. 다만 키리코가 말했던 것처럼, 해체하면서 튀어나온 장기를 떨어뜨려서는 안된다. 그의 장기는 와라와라들이, 동심의 아이들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영양분이기 때문이다.  


5. 군수산업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에 마히토는 전쟁 시기에 가장 부유함을 누렸다. 영화에서 전쟁통에도 통조림과 담배를 누릴 수 있었던 특권과도 같은자신의 처지를 하야오는 은밀하게 고백한다. 부유한 자신을 시기하는 학교 동급생들과 다투는 것이 이 소년에게는 가장 심각한 일이다. 그러니까, 11살소년에게 찾아온 것은 엄중한 죄의식이라든지, 정치적 각성 같은 것이 아니다. 마히토는 동급생과 한바탕하고 악의에 가득 차 길 위의 돌을 들어 자신의머리를 찍는다. 피가 꿀렁꿀렁 흐르며 집을 향해 걸어가는 마히토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표현일 것이다. 마히토의 위치에 가장 큰 해를 입힐수 있는 자는 자기 자신뿐이었다.   

6. 감독 하야오와 제작자 스즈키 토시오는 한 인터뷰에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친구를 발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친구를 만든다는 표현이 아닌 ‘발견’한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즈키 토시오는 첫 만남에서부터 싸웠다고 한다. 제작자 스즈키 토시오는 하야오가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언제나 고민하고 고뇌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하야오는 이상적인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고, 반대로 현실에서는 괴로워했다. 결국 둘은 지브리를 함께 이끌어가는 친구가 되었다. 친구는 발견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하야오는 이런 친구의 발견을 위해서 마히토라는 소년을 긴 여정으로 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발견은 여정을 떠난 자에게 찾아오는 산물이다. 그래서일까, 거짓을 이야기하는 진실된 왜가리가 마히토에게 ‘잘 있어, 친구여.’라 말하며 훨훨 날아가는 엔딩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7. 이세계(異世界)에서의 갖은 모험 끝에 당도한 나츠코의 산실은 마히토가 공교롭게도 이세계의 초입에서 목격한 고인돌 앞에 차려져 있다. 무덤과 산실이 하나이고, 죽은 언니와 산 동생에게 마히토가 나란히 엄마라고 부를 때 이세계는 서서히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곧 무너진다는 이야기다. 마히토가 여정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돌에 쓰여있던 것처럼, 배우는 자는 죽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서로를 끌어안은 마히토와 히미를 어느덧 이세계의 창조주앞에 데려다 놓는다. 다소 불친절한 세계를 급급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하야오의 마지막 전언과 마주하게 된다. 


8. 마히토의 큰할아버지, 이세계의 창조주는 악의에 깃들지 않은 13개의 돌을 쌓아 올려 세상을 유지 중이다. 여기서 마주한 창조주는 지브리의 그 어떤작품 중에서도 하야오 본인의 자아를 직접적으로 투영한 듯한 인물이다. 이 13개의 돌은 하야오가 그동안 발표했던 13개의 작품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창조주는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질 것 같은 돌탑을 움직여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낸다. “이걸로 세계는 하루는 괜찮을 것이다”라 말하며 위태롭지만 그럼에도 지탱되는 무엇이다. 악의 없는 돌을 안간힘을 써 아름다움으로 바꿔낸 세계다. 마히토와 큰할아버지,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노년을 조우시킨다. 창조주는 마히토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이세계를 이어달라고 부탁한다. 마히토는 자신의 심연을 고백하며 이를 거절한다. 그 증거는 마히토의 머리에 흉터로 남아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실제로, 하야오는 자신의 뒤를 이어 지브리를 이어갈 후계자를 찾기 위해 십수 년간 노력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 

9. 이세계는 결국 앵무새의 방해로 무너진다. 마히토는 히미의 손을 잡고 무너져가는 세계를 뒤로한 채 달려나간다. 마히토가 달려서 도착한 곳은 원래살던 현실이다. 큰할아버지가 창조한 세계보다 훨씬 불완전하고 균형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전쟁이 지속되는 현실의 문 앞에 다가선다.  


10.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하야오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고백한다. 결국 이것은 물음의 형식을 빌린 한 편의 거대한 에세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다.한 순간도 위태롭지 않았던 적이 없다(위태로운 것은 하야오 본인의 삶일 수 있고, 지브리 회사의 경영일 수 있다. 실제로 지브리는 회사의 명성에 비해경영적인 부분에서 순탄하지 못하였다).

11. 하지만 그 탑은 무너졌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토토로가 집을 향해 날아오고, 파도가 치면 포뇨가 바지를 걷고 바다 위를 달리며, 나무를 베려 하는 인간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원령공주가 산을 지키며 살아가는, 하야오가 그린 이상의 세계. 평생을 쌓아 올림에도, 하야오의 손길은 위태로운 아름다움이었다. 그럼에도 현실은 변함없었다. 마히토는 쓰러져가는 세계를 뒤로 한 채 현실의 문 앞에 다시 섰다. 모든 것이 혐오스럽던 현실이지만 여정을 통해 친구를 발견하고 배운 이 소년은 돌아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결국 무너지는 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불완전한 현실은 제자리에서 묵묵히 하야오를 기다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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