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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명의 관객 Jul 05.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

비인간화 시대의 선은 유령이다.

나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로 악의 평범성이란 키워드가 처음 등장한 것은 독일의 작가이자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였다.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취재했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행을 생각해 평소에도 잔혹한 면모를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아이히만은 너무나 평범한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 표현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주인공 루돌프 회스를 비추는 방식이 수용소에서의 악행이 아닌 가정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을 생각하면 많은 이들이 영화 속에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왜 굳이 들춰낸 과거의 내부가 아닌 겉면을 관찰하는 것일까?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당시 끔찍한 수용소의 모습을 배제하고 루돌프 회스 가정을 보여주는 방식을 사용한 이유는 영화가 홀로코스트 포르노가 되지 않은 채 시대의 증인으로 남기 위함이다. 현대의 아우슈비츠 연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영화 1위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라고 한다. 아무래도 그들은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대부분이 시대의 진실을 일부만 차용하고, 나머지 절반에는 적당히 감정을 동요시키는 이야기를 채워 넣는다고 느끼는 듯하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인생은 아름다워>, 심지어 철저히 주인공의 시선만을 따라가며 청각에만 집중한 <사울의 아들>마저도 그들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런 비판을 피해 가지 못하였다. 이런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평생 끝날 수도 없는 담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선택은 에둘러 가는 길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직설적인 활주로다. 폭력성을 거세한 프레임은 내밀하고도 차가운 기록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현실성을 위해 조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자연광만을 이용해 촬영하였다. 영화 중간에 뜬금없이 열화상 카메라로 비춰지는 소녀가 있다. 소녀의 장면은 글레이저가 영화를 만들기 위한 사전 조사 중 만난 폴란드 여성(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코우오제치크)의 실제 경험담에서 비롯하여 만들어졌다. 소녀는 밤마다 유대인들의 호송 루트와 노역 장소에 몰래 과일을 갖다 놓았다. 조명이 작동하지 않는 암흑의 시간, 소녀는 밤에만 활동할 수 있었고 그런 소녀를 감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녀의 체온을 감지하는 열화상 카메라다. 열화상 카메라에 비친 소녀는 흡사 유령처럼 보인다. 비인간화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소녀는 실체 없는 유령의 모습이다. 비인간화는 인간을 인간으로 있을 수 없게 한다. 


조나단 글레이저는 왜 다 지난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이것은 과거가 아니라고 답했다. 글레이저가 이것은 과거가 아니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의 말미, 심연의 계단을 내려가며 어둠으로 사라져가던 루돌프 회스의 모습에서 돌연 현재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을 비춘다. 이렇듯 과거에서 돌연 인위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점프를 통해 현재에 도달하는 엔딩은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글레이저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파헤쳐야만 드러나는 케케묵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잔여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회스가 아니라 현재의 여파다. 과거의 그들이 한 일을 보자는 것이 아니다. 이미 회스는 빛이 가닿지 않는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암흑으로 내려가는 회스에게 글레이저는 결코 열화상 카메라를 가져다 대지 않는다. 대신 곧바로 칠흑 같은 암전의 크레딧으로 철저히 묻어버리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음악을 튼다. 지금껏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던 아우성을 한꺼번에 응축시킨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음악 감독의 말에 따르면 엔딩 크레딧의 소리들은 베를린 지하철, 함부르크 축구 경기장, 2022년 파리 폭동 등 현재의 소리를 수집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글레이저는 회스를 묻어버리고 우리에게 또다시 현재를 들려준다. 그가 연결한 것은 비인간화 시대와 비인간화 시대다.


조나단 글레이저의 오스카 시상식 수상소감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때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는 의미죠.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으로 치닫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희생자, 가자 지구에서 자행 중인 공격으로 인한 희쟁자 모두 비인간화의 희생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 클로시치크, 영화에서만큼이나 실제도 빛났던 소녀의 삶과 저항 정신에 이 상을 바칩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윤리라는 것이 작동하지 않는 일들이 무미건조하게 자행되는 섬찟한 시대의 기록이다. 영화의 마지막, 비인간화의 되풀이가 예고된다. 타오르는 선의 초상인 소녀는 현시대에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는 유령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글레이저는 시대와 시대를 연결했지만 과거의 소녀와 현재의 소녀는 연결하지 못했다. 엔딩 크레딧의 음악은 기이하고 불쾌하다. 극장을 나오고서도 이 음악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현시대의 소녀를 찾지 못한 글레이저의 슬픔의 절규가 느리게 일렁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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