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Jan 30
순간은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일찍이 알게 되어 카메라가 발명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것을 계속 간직하고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다. 가끔씩 꺼내 보며 그 순간과 관련된 기억으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때로는 우리를 그 순간에 두어 사진 속에 가둔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그리워할 걸 알기에. 혹은 미래의 내가 그리워하게 될 과거의 누군가를 가두기도 하고.
가만히 있는 건물조차 초 단위로 조금씩 낡아진다. 아주 작아서 눈에 안 보이는 미세한 페인트가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부는 바람에 풍화되기도 한다. 오늘 다녀온 전시에서 이 이유 때문에 사진에 갇힌 건 아닐까 싶은 사물들을 잔뜩 보고 왔다.
내가 노란색을 언제부터 좋아했던가. 노란색을 보자마자 사실 노란색을 참 좋아하는 한 사람이 떠올라서 그런가 괜히 신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빨간색이다. 정열의 빨간색이라고들 하지. 내게도 빨간색은 정열이다, 누군가를 열렬하게 좋아했던 내 지난 과거를 보여주는 색. 두 색으로 벽을 칠한 방에 들어섰을 때, 묘하게 흥분되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색이 주는 힘도 있지만, 사진에 갇힌 알록달록한 순간들이 내가 마치 그곳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오감이 예민한 나는 HSP (Highly Sensitive Person) 이다. 감정도 예민하지만 감각이 예민하다. 그래서 쉽게 동화된다. 길을 걷다 내가 좋아하는 새파란 하늘, 푸른 이파리를 머금은 나무 그리고 갈색 벽돌로 지은 집만 있다면 나는 사진을 백 장도 넘게 찍을 수 있다. 혹은 온통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이 내게 쏟아질 것처럼 빛나면 나는 아무리 추워도 한참을 서서 목이 아프도록 쳐다보고 그 순간을 내 카메라에 가두 고야 만다. 너무 좋아서, 좋다는 말로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온몸이 설렘으로 가득해져서. 이 두 섹션이 오늘 내게 설렘이었다. 전시회장 조명 때문에 사진에 잘 담기지 않았지만, 내 눈과 머리에 잘 담아두었다. 나중에 꺼내볼 수 있도록 말이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생각났다.
솔직히 내용은 모르겠고 온갖 쨍한 색을 가진 이미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지만, 그 영화가 '호'라면 정말이지 평생을 그 영화에 나오는 색감과 이미지를 잊지 못할 것이다. 특히 분홍색을 말이지. 옅은 민트색을 온통 입고 있는 이 방에 걸린 사진들은 정말 다양한 분홍색을 담고 있었다. 눈에 확연히 보이는 분홍색이 아니더라도 그 사진을 통해 나는 분명 분홍색을 보았다.
분홍색은 차갑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색이다. 분홍색에 빨간색과 파란색의 비율이 어떻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 내가 느낀 분홍색은 모두 따뜻했다. '순간'을 사진에 담는다는 건 찍는 사람의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일까. 감정이 꼭 따뜻하지는 않겠지만, 정성을 담아 남긴 사진이기에 내가 오늘 느낀 분홍색은 모두 따뜻하지 않았을까.
'아, 좋다.'
온통 하얀색 벽에 파스텔 톤이 담긴 사진들이 잔뜩 있는 곳에 들어섰을 때, 커튼을 딱 열고 다음 세션으로 넘어갔을 때 내 머리를 가득 채운 생각이었다. 노란색과 빨간색이 가득한 곳에서 '흥분감'에 휩싸였다면, 이곳에서는 '포근함'에 휩싸였다. 균형이 잡힌 사진은 온통 차분한 파스텔 톤을 담고 있었다.
사진 속 파스텔 색은 경계가 뚜렷하게 칠해져 있었다. 분명 그랬다. 하지만 보는 나는 왜 이렇게 경계가 뭉그러진 것만 같았을까. 미술 시간에 파스텔로 그림을 그리면 쉽게 뭉개지고, 번지고, 손에 잘 묻어날 만큼 말랑한 촉감 때문일까. 잘 익은 마시멜로우를 한 입 가득 베어 문 것 같았다. 하얀 두꺼운 실로 짜인 이불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기분.
상아색이 푸른색, 초록색과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세계 여기저기에 있는 등대와 바다, 자연에 자리 잡은 집들이 가득한 사진. 두 가지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 등대는 오고 가는 배를 위해 존재한다. 사람이 주거하는 집은 연속성과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 꾸준히 누군가가 거주하니까. 게다가 등대는 동적인 물체이고 집은 정적인 물체이다. 이렇게 반대되는 두 가지의 물체가 상아색 위에서 조화롭게 놓여 있었다.
Whale a minute!
웨잇어미닛 - 웨일어미닛, 그 어떤 사진을 보고도 웃지 않았는데 보자마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찍은 사람도 저걸 만들어 쓰는 사람들도 센스가 남다른 것 같아서. 이 사진이 더 웃긴 이유는, 평범한 그러니까 단조로운 상아색과 함께이기 때문은 아닐까. 단조로움 속에 있던 이 사진은 마치 내게 '이럴 줄은 몰랐지?' 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Deep end', 수심이 깊다는 걸 알려주는 사인. 온통 파란색으로 칠해진 곳에 수영장 사진 하나 쯤은 있겠지 싶었는데 꽤 많았다. 그중에서 내 맘에 가장 들었던 이 사진. 사진에 담길 때, 수영장 속 물에 파동이 있었음이 보여서, 정말 순간이 담긴 것 같아서 좋았다. 이 사진을 통해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내 마음은 깊으니 다가오려거든 조심하라는 걸까. 아니면 내 마음이 너무 깊어 당신을 잊기가 힘들다는 걸까.
'Mind the gap', 영국 튜브에 가면 쉽게 볼 수 있고 쉽게 들을 수 있는 말. 영국이 떠올랐다. 이곳에 수많은 영국 발 사진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이 사진에서 떠올랐다. 나는 과연 내가 보고 느꼈던 순간을 사진에 잘, 많이 담았을까. 글쎄, 오히려 내 기억에, 마음에 많이 담았던 것 같다. 영국과 한국에서의 생활에는 'gap'이 있으니 마음에 잘 유의하라는 뜻에서, 나중에 자주 꺼내볼 수 있도록 시시각각 변하는 모든 것들을 담아두었다. 눈 감으면 바로 떠올릴 수 있도록.
'Karlsruhe Hauftbahnhof', 카를스루에 기차역.
이 앞에서 정말 오래 서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면서. 울컥도 했다. 너무 그리운 곳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해서. 이 전시에서 단연코 내가 사진에 가장 담고 싶었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저곳은 내가 뺀질 나게 드나들었던 곳이다. 독일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곳이니까. 너무 그리워서 2018년에 회사에서 3일의 휴가를 받고 주말을 붙여서 빠듯하게 다녀오기도 했다. 이 사진을 보고 내가 울컥했던 이유는 내 마음과 내가 찍은 사진 속에 담기고 갇힌 '순간'들이 떠올라서가 아닐까. 사랑했던 사람, 행복했던 추억들이 가득한 곳. 지금은 그리움만 가득한 그 '순간'들이 하나둘씩 떠올라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다시금 만날 때까지 안녕.
자꾸 되새기면 그리워 마음이 아픈 순간들이니 다시 덮어두기로 하자.
2019년 8월 버밍엄역,
내가 사진에 담고 가둬둔 순간이다.
동적인 것을 정적인 사진에 담는다는 건 꽤나 복잡함의 집합체인 것 같다. 그때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남기는 거라지만, 순간을 눈으로 다시 마주하면 그때의 감정들도 함께 깨어나곤 하니까. 분명 영원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을 담기 위해 나는 '사진'이라는 기록물을 남겨두었지만, 언젠가 늘 끝나고야 마는 감정도 담아두고 말았다. 아마 다른 이들도 그렇겠지. 그래서 오늘 다른 이들이 찍은 사진을 통해서 나는 언제인지도 왜인지도 모를 그 순간을 통해 기분이 시시각각으로 변했겠지.
내가 찍은 이 사진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감정이 느껴지는지 궁금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