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Feb 28
2018년 10월 20일 금요일,
처음 입사한 회사 8개월 차 뒤늦게 여름휴가를 쓰기로 했다.
목적지는 지금의 내가 있게 한 곳, 독일.
출근길, 사람이 바글바글한 서울 지하철 2호선에 캐리어를 들고 탔다. 부러 조금 일찍 출발했지만 사람은 늘 그랬듯이 많았다. 이른 출근 덕에 캐리어를 조용히 끌고 사무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미 비행기 티켓을 끊기 전부터 독일에 가겠다고 했던 나라, 다들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옆 빈자리에 캐리어를 세워두고 일찍 일을 시작했다. 반드시 6시 땡 하자마자 퇴근해야 했다. 다행히 회사 바로 앞에 KAL 리무진 정류장이 있어서 공항까지 문제는 없었다.
차들로 가득 찬 도로 위에서 오랜 시간 버스를 타야겠구나 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한 시간 조금 더 지났을 때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 제2터미널, 처음 오는 곳이라 모든 게 신기했다. 매번 1 터미널을 이용했던 내게, 2 터미널은 신세계였다. 사람도 적었고, 매우 쾌적했으며 수속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퇴근하고 바로 온 나를 위해 1층에는 유료 샤워실도 있어서 좋았다. 면세품을 찾고 밀려오는 피로에 휴게실에 몸을 기댔다. 침대까지 놓인 공항이라, 적지 않게 다양한 공항을 다녀본 내게는 놀라움이었고 자부심이었다. 우리나라가 이런 곳이다, 하는.
마침내 비행기에 탑승했고, 미리 지정해 둔 덕에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비상구에 앉게 되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게 있는데, 네덜란드 항공이라 그런지 옆에 앉은 두 명의 남성분의 다리가 매우 길고 키가 몹시 컸다. 거인이 따로 없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고 있는 계절이라 항공기 내부는 더욱더 추웠다. 나눠준 담요를 다리에 칭칭 감고 챙겨간 외투도 껴입었다. 기내에는 반갑게도 한국인 크루가 딱 한 분 계셨다. 그리고 비행하는 내내 자리에 앉아야 할 때면 내 앞에 앉아 계셔서 참 좋았다.
한국 인천 공항에서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
설레는 마음에 잠도 오질 않아서 영화도 보고 노래도 듣고 일기도 썼던 것 같다. 중간에 러시아와 핀란드 쪽을 지나갈 때는 창가에 앉아서 그런가 더욱더 추웠다.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담요를 더 끌어다 덮었다. 그러다 깜빡 졸았다 깨니 네덜란드 상공에 도착해 있었다.
추위와 싸운 내게 줄 수 있는 건 커피였다. 따뜻한 라테를 시켰다. 내 영어 이름의 스펠링은 Hailey 지만 대게 말하면 저렇게 쓴다. 오랜만에 쓰는 영어라 떨리는 마음에 주문했는데 인종차별 심하다는 곳에서 친절함을 느껴서 그런가 그저 기분이 좋았다. 스키폴 공항은 유럽의 허브 공항 중 한 곳이다. 그래서 늘 다양한 사람들이 많다고. 북유럽 근처여서 그런가, 하나같이 사람들이 키가 컸다. 성별 상관없이 말이다. 한국에선 나도 작은 키는 아닌데, 되게 작아진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기내에서 받은 칫솔과 치약을 들고 화장실을 갔다. 이를 닦기 위해서. 하지만 이상하게 세면대가 너무 작고 높게 위치해 있었다. 딱 손만 닦을 수 있는 크기와 위치. 이를 닦는 나를 사람들이 되게 이상하게 쳐다봤다. 왤까. 그 이유는 시간이 좀 흐른 후에 알 수 있었다. 독일에서 지낼 때도 몰랐던 사실인데, 서양인들은 남들이 다 보는 공용 화장실에서 이를 닦지 않는다고 한다. 약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그러고 보니 독일에서 학교 다닐 때, 세면대가 정말 손만 닦을 수 있게 작았고 이를 닦는 사람도 몇 없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차이였다. 찝찝할 텐데.
세 시간쯤 대기하다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깜깜한 새벽에 내렸었는데, 비행기에 오르니 해가 뜨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 온통 하얀색과 파란색이 가득한 곳에 붉은빛이 물드니 그 모습은 장관이 아닐 리 없었다. 독일로 향하는 그 짧은 비행에서 셔터를 얼마나 눌렀는지 모르겠다.
네덜란드 스키폴공항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
처음 Frankfurt 공항에 도착했을 때가 떠오른다. DB bahn을 예약해야 공항에서 교환학생을 보낼 동네에 도착할 수 있는데, Frankfurt가 붙은 기차역이 매우 많아서 난감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간단했다, Frankfurt flughafen - 독일어로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쓰인 곳부터 예약하면 됐다. 그래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공항에 내려서 기차역까지 가는 길이 최악이었다. 온통 독일어로 쓰여있는 곳, 그리고 매우 큰 크기의 공항. 기차역까지 가는 방법도 여러 가지. 이번에는 Skyline을 타고 쉽게 기차역으로 향했다.
'Ich bin in Flughafen Bahnhof'
내가 기억하는 독일어로 쓸 수 있는 최대치. 고맙게도 내가 동네에 머무는 그 하루 동안 나를 위해 친구가 시간을 내주었다. 공항에 도착하면 연락하라는 말을 기억하고 역에 있다며 사진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을 친구에게 왓츠앱을 보냈다. 곧 보자는 답을 받고 설레는 마음 그대로 기차에 올라탔다.
난생처음 유럽이라는 큰 대륙에, 그것도 EU 중심에 서 있는 독일에 도착했던 날이 떠오른다. 공항에서 기차역까지 진을 빼며 도착한 나는 짐을 들고 기차에 올라탔다. 다만 자리를 예약하고도 짐을 따로 둘 곳이 없어 칸과 칸 사이에 짐을 기대어 놓고 서서 두 시간가량을 가야 했다. 그때는 힘든 것도 몰랐다, 너무 설렜으니까. 두려움만큼이나 설렘이 커서.
DB Bahn, 지겹도록 탔던 기차. 어디에 앉아야 짐을 편히 놓고 탈 수 있는지 꿰고 있는 내가 멋지게 느껴졌다. 서서 가지 않고 자리에 앉은 나는 차창밖에 펼쳐지는 독일을 맘껏 감상했다.
Karlsruhe HauftBahnHof
다음 역이 내 목적지임을 방송으로 들었을 때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 내게는 너무도 그리운 곳, 좋은 기억만 가득한 곳이었다. 14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4년 만에 방문하는 곳. 너무 그리워서 눈을 감으면 아직도 훤히 보이는 곳이다.
기차에 내리니 저 멀리 나를 향해 팔을 높게 뻗어 흔들고 있는 친구가 보였다. 나는 달려가 친구를 품에 안았다. 친구는 오랜만이라며 나를 향해 웃었고 나는 애써 울음을 참고 웃어 보였다. 우선 내 짐을 숙소에 놓고 오자며 내 캐리어를 이끄는 친구를 따라 역을 벗어났다.
꿈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꿈의 시작이었다.
+ 처음 독일에 온 날, 비가 왔다. 나는 하필 캐리어도 아니고 이민가방을 들고 왔었는데 전차 중에서 S-bahn이라고 좀 계단을 올라가서 타야 하는 게 있다. 올라탈 때도, 내릴 때도 난생처음 보는 외국인이, 독일인이, 코쟁이들이 쿨하게 같이 올려주고 내려줬다. 당케-라고 말하긴 했지만 부끄러웠다. 중간에 잘못 내렸을 때도 도와줬었는데 그때 뭔가 인종차별에 대한 걱정이 많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그대로다.'
역을 벗어난 나는 모든 게 그대로임을 느꼈다. 역 앞에 복잡한 전차 노선도, 북적거림도 정말 싫었던 비둘기 떼도. 독일의 난민 정책 이후 동네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그래서 걱정했는데, 동네는 그대로였다. 아직까지는 말이지. 바로 다음 날 새벽 일찍 기차에 올라야 했기에, 기차역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4인실 도미토리룸이었는데, 워낙 일찍 체크인을 한지라 1층 베드에 이불 커버를 씌우고 방을 벗어났다.
숙소에서 내가 수속을 하는 동안 친구는 내 짐을 들어다 올려주고 (엘리베이터가 당연히 없다) 화장실에 갇힌 나를 꺼내주기도 했다. 세계에서 키패드로 문을 잠그고 여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독일은 정말 정직하게 키로 모든 걸 열어야 했는데, 문제는 오래된 문들이 많았다. 노하우가 있어야 문을 열기 쉽다는 말이다. 처음 묵는 곳에 그것도 오랜만에 키를 사용하는 나라에 오니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가려는데 어라, 문이 열리지 않았다. 친구가 밖에서 조금 (사실 많이) 웃더니 주변에 도움을 청해 나를 꺼내주었다. 휴, 1분 1초가 아까운데 이곳에 갇혀서 못 나가면 어쩌지 정말 무서웠다.
Bibliothek, 도서관
나는 도서관을 굉장히 좋아한다. 어디를 가든 도서관은 꼭 가본다. 내가 들어갈 수 없는 도서관도 있지만, 들어갈 수 있다면 반드시 들러본다. 건물을 가득 매운 덩굴들의 잎이 붉게 물들어 있는 곳, 내가 수학했던 학교의 도서관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많은 책들도 좋았고, 오래된 책이 뿜어내는 냄새도 좋았으며, 뭔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곳의 학생들을 보며 나도 열심히 공부해 보자 마음을 잡았던 기억이 있다.
Mensa, 학생 식당
그리고 이곳을 지나쳐 조금 더 걸으면, 하얀 건물의 학생 식당이 나온다. 사실 카페테리아에서 주로 식사를 하거나 친구들 기숙사에 쳐들어가서 먹었던 터라 이곳에서 먹었던 기억이 많지는 않다. 이곳은 음 약간 이케아 안에 있는 식당과 시스템이 비슷했다. 하얀 그릇 위에 그날 그날에 따라 다른 메뉴들을 골라서 담으면 나중에 계산을 하는. 계산은 당연히 충전되어 있는 학생증으로. 나는 학생증 충전을 하지 않았어서 친구들 카드로 같이 계산하고 나중에 돈을 주곤 했다. 충전하러 가는 게 귀찮기도 하고, 자주 먹지도 않았으니까.
Hochschule Karlsruhe Technik und Wirtschaft
우리로 따지면 3년제 대학교 느낌이랄까. 시스템이 좀 다르긴 하지만 쉽게 설명하면 그렇다. 한 군데 강의동이 모여있지 않고 좀 넓게 퍼져있다.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수업 듣는 재미가 있었다. A동은 학생회가 있는 건물이다. 그리고 2층은 작은 도서관. R동은 임직원들이 있는 곳이고.
사진 하단 왼쪽은 카페테리아와 학교 동아리가 모여있는 정말이지 학생들은 위한 건물이었다. 나는 주로 점심을 저 카페테리아에 가서 핫도그로 때웠다. 밖에서 먹기도 하고 안에서 먹기도 하고. 저기서 팔던 쿠키랑 빵들도 다 맛있었다. 그리고 조별과제를 하기 위해 모이기도 했고. 그때는 뭐가 그리도 웃기고 즐거웠는지 항상 친구들과 모이면 웃고 떠들기 바빴다. 영어를 잘 못했던 나였는데, 친구들은 항상 내가 말을 할 때 기다려주고, 소위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줬다.
하단 오른쪽은 F동, 교환학생인 내가 주로 수업을 듣던 곳이다. 국제 경영 관련된 수업과 독일어 수업. 정말 추억이 많은 건물이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 F동 1층에서 독일어 비기너 수업을 들었었다. 같이 간 동문 언니는 독문과여서 다른 레벨 수업을 듣는지라 나는 매일 혼자 강의실에 들어가야 했다. 초반 나는 언니와 헤어지면 강의실 문고리를 잡고 기도했다. '제발 나에게 아무도 말 걸지 말아 줬으면.' 지금 생각해 보면 멍청한 기도였으나, 그때는 간절했다. 영어로 말하는 게 꽤나 무서웠으니까. 나중에는 적응하고 오히려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친구들 하니까 떠올랐다. 나를 마중 나온 친구는 사실 교환학생 온 나와 전혀 만날 일이 없는 건축학과 친구였다. 그러다 교환학생 중에 건축학 수업을 듣는 친구가 한 펍에 이 친구를 데려왔고 거기서 친해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 친구와 다양한 시간을 보냈었다. 가끔 술도 한 잔 기울이고, 산책을 같이 하기도 하고, 서로 먹을 걸 만들어서 주기도 하고.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 중 하나다.
아, 내가 문고리를 잡고 기도했던 한 가지가 더 있다. '오늘도 인종차별을 하지 않게 해 주세요.' 내가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혹시 나도 모르게 그럴까 봐. 편견 없이 친구들을 바라보고 싶었고, 그들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런 내 노력 덕에 나는 다양한 국가에서 온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꽤 받았다. 워낙 세상에 관심이 많던 나는 국가별 특징이나 종교적 특징을 꿰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모여서 음식을 먹을 땐, 주로 닭 요리를 해서 먹었고 개개인의 사정을 존중했다. 나로서는 당연한 거였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이 태반이었던 기억이 있다.
+ 어쩌면 내가 이곳에서 다양한 좋은 친구들을 만났기에 편견이 많이 사라진 건 아닐까 싶다. 물론 편견이 생기기도 했지만 뭔가 좀 더 오픈마인드가 되고 생각이 트이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다 좋은 친구들 덕분이고, 지금도 너무 보고 싶다. 이후로 본 건 독일과 대만 친구들 뿐이니까. 아 멕시코 친구들 중에 한 명 포함. 너무 그립다.
학교는 숲 한가운데에 있다. 사실 동네 한가운데 커다란 숲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유는 독일에서 계획적으로 만든 계획도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로도 자로 그은 것처럼 나있어서 처음 이곳 지도를 봤을 때 신기했다.
학교에서 내가 살았던 곳까지는 걸어서 넉넉하게 20분. 대부분 기숙사에 살았지만 나는 운이 좋게 셰어하우스에 살 수 있었다. 이것도 사연이 굉장히 긴데, 간단히 말하자면 흔한 옐로 피버 덕에 얻은 이득이었다고나 할까. 집 렌트를 관리하던 중국인 친구 덕도 굉장히 많이 봤고. 다들 석회수 물에 힘겨워할 때, 나는 아파트에서 그나마 나은 질의 물로 생활할 수 있었다. 동문 언니와 같은 방 같은 침대를 쓴 덕에 렌트비도 저렴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지낼 수 있었을까 싶다.
아침에 나는 이 숲을 걸어오는 게 너무 좋았다. 울창한 숲이 주는 특유의 향도, 시시각각 변하는 색들도 모두. 그러고 보니 독일에 온 첫날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서 이게 뭐지 싶어 눈을 뜨니, 창밖으로 펼쳐진 숲과 반짝이는 햇살 그리고 나뭇가지에 앉아서 지저귀는 새들까지. 창을 내다보면 빽빽한 아파트만 가득한 곳에서 자라온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독일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이 숲을 사랑하게 되었고 학교를 가려고 걸어온 쪽이 아닌 그 반대편으로 좀 더 걸어가면 나오는 큰 공원도 사랑하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딱 땅을 밟았을 때 '아, 왜 이렇게 딱딱하지.'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온 사방에 깔린 흙을 밟는 게 내 즐거움 중 하나였다.
Achtung!
숲을 지나 얼마쯤 걸어왔을까. 갑자기 차 혹은 지상을 지나가는 Bahn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곳에 설치되어 있는 표지판이 보였다. 반가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 표지판을 지나 살던 곳 바로 앞에 있던 Rathaus (시청)을 지나니 내가 살던 아파트가 보였다. 매번 갈 때마다 독일어로 이야기해 보라고 나를 괴롭혔던, 수요일은 오후 근무만 하고 목요일은 오전 근무만 했던, Termin (약속, 예약, 일정)을 잡기가 힘들고 잡고 가도 무한 대기를 시켰던 시청 (외국인 사무소만)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다. 시청을 지나 아파트로 가기 위해서는 Banh이 지나가는 철로를 건너야 했는데, 얼핏 보니 노선이 더 생긴 것 같았다. 아예 변하지 않은 건 아니구나.
+ Abmeldung (전출신고) 하던 날이 기억난다. 내 생일이었다. 독일을 떠나기 전 필수코스였다. 라트하우스에 가서 번호표를 뽑고 압멜둥을 하는데, 글쎄, 담당직원분이 어디로 가냐며 독일어 영어 섞인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다가 (Sweiss 스위스로 간다고 했었다) 여권을 보더니 생일 축하한다며 옆에 직원한테도 얘 오늘 생일이야~ 하면서 축하하자! 하는데 너무 고마웠다. 아저씨 잘 지내시죠?
1층 모서리에 보이는 집에 살았다. 저 베란다가 내가 동문 언니와 살았던 방이다. 날이 좋으면 음식을 해서 베란다에서 먹기도 하고, 차도 마시고 했었는데. 렌트를 관리하던 친구도 이제는 더 이상 살지 않아서 그런지 내가 알던 베란다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 뒤로 돌아가면 작은 텃밭 겸 정원과 분수대가 나온다. 정원에서 내가 특히 좋아했던 곳이 있는데, 바로 색색의 장미가 가득한 곳이었다. 가을에 방문해서 볼 수는 없었지만 눈앞에 훤히 보였다. 지나가면 맡을 수 있었던 향긋한 냄새도 그대로인 것 같았다.
건물 뒤로 돌아온 이유는, 쉬는 날 아침에 눈 뜨면 필수 코스로 향했던 곳을 가기 위해서. 건물 뒤 아카시아 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는 길을 지나가면 Apotheke (약국)가 하나 나온다. 그걸 왼쪽에 끼고 모서리를 돌면 보이는 게 바로 Penny! 마트다. 쉬는 날 눈 뜨면 언니와 아무 말 안 하고 핸드폰을 하다 슬슬 배가 고파지면 우리는 입을 뗐다. '뭐 먹지?'
'Schoenen Tag noch!'
계산을 하고 매번 점원에게 건네고 싶어서 계산 줄 서서 내내 연습했던 말이다. 좋은 하루 보내라는 말이 왜 이렇게 꺼내기 힘든지. 게다가 계산 금액을 독일어로 말해주다 보니 금액을 알아듣기 바빴다. 독일어로 숫자 읽기는 악명이 높기 때문이다. (64. 25 Euro는, Fier und Sechzig Euro Fünf und zwanzig) 그 당시에는 카드 이용이 흔하지 않아서 동전 지갑까지 들고 다니며 계산을 했다. 다시 방문한 나는 내가 사랑했던 초콜릿들과 하리보를 잔뜩 집어 들었다. 쇼핑을 여기서 하냐는 친구의 말에 일단 생각난 김에 사고 싶다고 했다. 무거워서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물론 친구가 들어줘서 나는 전혀 불편하지 않고 편했지만, 내 짐을 도맡아준 친구에겐 미안했다.
Europaplatz, 쇼핑할 수 있는 곳이 즐비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독일에 오일 파스텔과 색연필이 유명한 브랜드가 있다. 미술 하는 동생이 부탁한 게 있어서 그걸 사러 나왔다. 주말이라 사람이 한가득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지냈을 때에는 이것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 일단 여길 나오면 해야 하는 게 길거리에 파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구경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케밥을 사 먹는 거였다. 이번에도 그러고 싶었으나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어서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독일에 살 때는 흔히 보던 브랜드들이, 정작 들어가 본 적도 없는 곳이 태반인데 왜 이렇게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냥 이곳에 깃든 좋은 기억들 때문에 모든 게 그리웠던 거겠지.
띵띵, Bahn이 비키라고 울리는 소리를 들으니 치일 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었던가, 이야기하느라 정신없어서 뒤에 다가오는 줄도 몰랐다. 친구의 도움으로 살았지만, 정말 깜짝 놀랐었지. 내가 살았을 때는 여기저기 공사하는 곳이 많아서 도보가 정말 좁았다, 그래서 위험했었는데 지금은 공사가 거의 다 끝났단다. 그러고 보니 건물을 가렸던 천들도 사라졌고, 공사하느라 길 위를 덮어두었던 합판들도 사라져 있었다. 이곳을 기억하는 내 머릿속 방이 업데이트되던 순간이었다.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Schloss, 이 도시의 랜드마크.
내가 지낼 땐 이곳도 공사 중이었다. 한쪽이 공사 중이라 천으로 덮여 있었는데, 다시 오니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른 시간에 와서 좀 앉아 있고 싶었는데, 짧은 시간 내에 도시를 다 돌아다니려고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자전거가 흙 밭을 굴러가며 내는 소리, 사진에는 없지만 분수대에서 물이 차악하고 떨어지며 내는 소리. 거기에 선선하게 부는 바람과 지면서 제 열을 다 전해주고 있는 노을까지.
이곳에서 쌓아내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다들 이곳에 함께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보고 싶어 옆에 있던 친구를 쳐다봤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며칠 안 되는 주말을 다 붙여 써도 5일밖에 안 되는 그것도 비행기 왕복 시간을 따지면 3박 4일 밖에 안 되는 일정이라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였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는데, 어느새 해는 그 모습을 감추었고 내가 좋아했던 보랏빛 하늘을 보여줬다. 이쯤이면 기숙사 주방에 모여 오늘을 어떤 맛있는 걸 해 먹고 어떻게 놀아볼까 친구들과 궁리했었는데, 왜인지 씁쓸한 기분에 입고 있던 카디건을 더 여미며 걸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성을 찾았다. 이곳은 밤에도 예쁜 곳이니까. 한때는 이곳을 밤에 산책하며 사랑놀이하기 딱 좋은 곳 아니냐고 동문 언니와 떠들기도 했었다. 내가 너무 분위기에 취했던 걸까? 찍은 사진을 보니 다 수평도 안 맞고 초점도 나가고 이상했다. 분명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말이지. 독일에 다시 간다고 큼 맘먹고 카메라도 새로 장만했는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걷는데 갑자기 친구가 행복하냐고 물었다. 고민도 하지 않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곳에 있는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다고. 그러자 한국에서의 나도 행복하게 지내고 있냐 물었다.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행복, 그게 뭐지. 그런 걸 느낄 틈도 없이 보내고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몸에 발진이 일어나고 온갖 이상한 병이 생기고. 그래서 쉬려고, 좀 행복하고 싶어서 몸이 고단할 게 뻔한데 장거리 비행까지 하며 이곳을 찾았다. 대답하지 않고 걷기만 하는 내게 친구가 장난스럽게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다. 마치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이곳인 것처럼. 내 고향이 이곳인 것처럼. 그럴까,라는 내 말을 끝으로 공원을 벗어날 때까지 우리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숙소 앞까지 친구가 데려다주고 우리는 다시 만났을 때처럼 꼭 서로를 안아주었다.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가웠다고, 다시 또 보자고. 먼저 들어가라는 말에 힘겹게 몸을 돌려 숙소로 돌아왔다. 씻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울고 싶은데 뭔가 울지 못하겠는 기분. 서둘러 머리를 말리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한 시간도 채 자지 못한 상태로 나는 새벽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역까지 오는 길이 무서워서 혹시 홈리스라도 만날까 긴장했던 몸이 기차에 오르니 나른하게 풀어졌다. 그제야 눈물이 차올랐다. 왜 기차만 타면 이렇게 눈물이 나지. 기차만 타면 신나야 하는 게 정상인데. 내 행복이 이곳인 것처럼, 행복을 두고 떠나는 사람처럼 나는 아무도 없는 기차 안에서 엉엉 울었다.
하룻밤의 꿈이자,
내가 다시 꿈을 꾸도록 만든 하루였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되는 그 시작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