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애정하는 찰나의 모음집; Vancouver

22 Jul - Sep

by LUX

두 달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밴쿠버의 가장 찬란한 계절을 함께 했음에 웃으며 뒤로할 수 있었다. 토론토로 이주하는 것이 결정되면서 한 번은 꼭 기록하고 싶었다. 내가 느끼고 본 밴쿠버의 여름을. 이 글을 쓰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잘 담아둔 추억들을 떠올려 써 내려간다.





068f1cd6cfb131b7fc2b63fb033dc9ef.png
da09e7d894aa3feb33975146ef62f430.png


처음부터 날이 좋았던 건 아니었다. 밴쿠버의 여름은 덥고 맑다고 했는데, 처음 삼일은 구름이 잔뜩 껴서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볼 수 있는 게 없는 정말이지 무채색의 매일이었다. 알록달록한 대자연은 내려오는 빛 아래에서 그렇게 색을 잃고 있었다. 나 역시도 그 시간 동안 계속 우울감에 사로잡혀 온전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8aeb874300de61419947bd50d54b502e.png
e47de724021167b4d46dc9feec93356e.png
c2ac3ea3d0e5e3d0c177898ee95ab612.png


캐나다에 도착한 지 나흘째, 드디어 해가 떴다. 맑은 하늘을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이제야 키가 큰 나무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캐나다라는 나라의 대자연 속에 작은 내가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여기에 왔는지, 뭘 해야 하는지.





f64a192af119a0744a715d628303a84d.png


빅토리아 여행을 다녀와서 나를 힘겹게 했던 에어비앤비에서 나와 집을 이사했다. 이사한 집은 천국이었다. 아기자기한 파티오도 있고, 집에 벽난로도 있었다. 무엇보다 집주인 할머니가 너무 좋은 분이셨다. 집에는 작은 댕댕이도 있었는데, 까칠했지만 귀여워서 웃음이 나는 존재였다.





dd.png
ddd.png
f64a192af119a0744a715d628303a84d.png
d.png


다운타운을 가서 카페에서 혼자 커피도 마시고, 구경도 했다. 그 사이에 한국인 몇 분도 만나 마음에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할머니의 도움으로 한인마트에서 김치와 무거운 쌀도 샀다. 집 근처에 있던 이케아에 가서 베개와 옷걸이를 사고 나오는 길에는 뜨거운 볕 아래에서 걷기 위해 아이스크림도 사서 먹었다. 그늘을 지나칠 때면 느껴지는 여름 특유의 냄새와 기운에 살며시 웃음 짓곤 했다. 여름의 브리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d.png
a.png
q.png
c.png


밴쿠버에 오면 꼭 해봐야 하는 것이 있다. 자전거를 빌려서 스탠리 파크 둘레를 도는 것. 날이 더 더워지기 전에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아침에 일찍 길을 나섰다. 근처에서 물 한 병과 도넛 하나를 사서 자전거를 빌렸다.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라 처음에는 중심 잡기가 힘들었지만, 금세 익숙해진 몸은 힘껏 발을 구를 수 있도록 온 에너지를 다리로 보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눈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 그 자체였다. 푸른 숲 속이 뿜어내는 맑은 공기가 머리를 비워주었고 귀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멜로디가 절로 노래를 따라 부르게 했다.


언덕에 봉착하고, 나는 결국 자전거에 내려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했다. 자전거 위에 앉아 페달을 구르며 올라가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은 많아 보이는 어르신분들을 보며 속으로 존경을 내비쳤다. 마침에 꼭대기에 올랐을 때, 나는 다시금 자전거에 올라탔다.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내리막을 앞에 둔 나는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와 숨길 줄을 몰랐다. 내 몸 하나 챙겨 올라오기 힘든 언덕을 자전거까지 끌고 올라온 내게 주는 보상이 어떤지 아니까. 출발과 동시에 구르던 발에 힘을 풀고 양쪽으로 다리를 쭉 뻗었다. 시원하다 못해 찬 맑은 바람이 내 온몸에 닿고 뻥 뚫린 도로는 모든 안 좋은 것들을 내게서 앗아가 나를 자유롭게 했다.


신나게 달려 내려온 내 앞에는 광활한 바다가 놓여 있었다. 물을 좋아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다 말이다. 잉글리시 베이 앞 벤치에 앉아 싸 온 도넛을 먹고 목을 축였다. 내리쬐는 해가 뜨거웠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오로지 내게 남은 건 기쁨 하나였다. 완주를 끝냈다는 기쁨 아래 너무도 나를 힘겹게 했던 것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q.png
dddd.png
dd.png


그랜빌 아일랜드, 내가 캐나다로 오기 전 다시 시작한 걸어서 세계 속으로 첫 방송 여행지가 이곳이었다. BC 밴쿠버 쪽. 거기서 여기가 나오기도 했도 한 번쯤은 다들 방문하는 곳이라 나도 방문했다. 사람이 많아서 정신이 없었지만, 이곳에서 오랜만에 먹은 멕시코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불어오는 바람에 짠 내음이 가득해서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이 짠 건지, 아니면 불어오는 바람이 짠 건지 순간 헷갈리기도 했지만 온전히 좋은 날씨를 즐기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z.png
f.png
v.png
c.png


포트무디,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드라이브를 나왔다. 댕댕이와 함께 산책 겸 나온 이곳은 주말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유가 넘친다고 해야 할까. 날이 조금 더웠지만, 그늘 아래에서는 시원함을 유지하고 있어 딱 좋았다. 물이 나가고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즐길 수 있는 것들도 있고, 앉아서 쉴 수 있는 곳들도 충분하고. 이곳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맑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볕 아래에 서면 살이 익는 것 같은 기분에 오래 있기는 힘들었지만 그 기분과 느낌이 싫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색들로 가득한 이곳에 물까지 있으니 내게 천국이 아닐 수 없었다.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한껏 즐겼다.





x.png
xx.png
xxxx.png
xxx.png


계속해서 이어지는 맑은 날씨를 최선을 다해 즐기던 중, 드디어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걱정 가득 가지고 출근하는 내게 걱정 말라는 듯이 날씨가 나를 위로했다. 걸어서 다니던 그 길들이 힘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못하지만 날씨가 좋으니 감안할만했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동료의 도움으로 반쯤은 차를 타고 다녔으니 매일 오고 가는 길목에 걷는 시간이 내게는 더 중요해졌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할 수 있었으니까. 대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생각과 상상이었지만 나라는 사람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z.png
zz.png
zzz.png


할머니 찬스로 방문했던 노스 밴쿠버. Sea bus를 타고 오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할머니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왔다. 눈앞에 탁 트인 바다가 놓이니 기분이 나빠질 틈이 없었다. 눈이 너무 부셔서 선글라스를 끼고 바닷가를 따라 쭉 걷는데 산 정상에 오른 것처럼 바다를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발걸음이 음표라면 나는 이날 신나는 템포의 곡을 하나 썼을 것이다. 그만큼 내 발걸음에는 신남이 가득했으니. 바다를 좋아함에도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던 나는 밴쿠버에 와서 자주 접하는 물에 매일이 행복했다.





ff.png
f.png


뜨거운 열기는 여전했지만 시간이 차츰 흐를수록 나무에서 이파리들이 색 옷을 입고 바닥 아래로 가뿐히 낙하했다. 이른 아침과 밤에는 불어오는 공기가 찼고 그 사이에 가을의 향이 가득했다. 여름 브리즈를 더 느끼고 싶으면서도 내가 가장 애정하는 계절이 다가오는 것이 싫지 않았다. 둘 사이에 놓인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황홀했다.





a.png
aa.png
aaa.png
aaaa.png


일찍 지고 늦게 뜨던 해 역시도 이제 조금 피곤한지 늦게 뜨고 일찍 지기 시작했다. 출근쯤이면 늘 완벽하게 떠 있던 해가 출근을 하면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는 노을만큼이나 좋아하는 이 순간을 즐겼다. 쌉쌀함이 묻어난 공기에 바삭이는 햇살이 더해지니 특별하지 않을 수 없지.





ss.png
s.png


푸르렀던 모든 것들에 노란빛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가을이 오고 있음을 말해주듯이. 동네에 항상 활짝 피어있던 무궁화들이 낙화하기 시작했고,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구름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8월 하순, 떠나야 하는 시간이 순식간에 내게 다가와 앞에 놓였다.





d.png
dd.png
ddd.png
dddd.png


킷칠라노 해변, 밴쿠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변이다.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앉아서 나는 밴쿠버를 뒤로할 준비를 시작했다. 정든 친구와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푸른 하늘이 붉은빛의 옷을 덧 입고 별들이 수놓을 흑색의 하늘로 변할 때까지 멍하니 나는 바다를 바라봤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바다를 이제는 어렵게 접해야 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울적해졌지만, 괜찮을 거라고 모든 것들이 다 물 흐르듯 지나갈 거라며 이곳에 모든 것들이 나를 위로했다. 앞만 보고 가라는 듯이. 하지만 자꾸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해변을 벗어나면서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x.png
xx.png


가을 냄새가 온 공간을 가득 채웠다, 벌써 9월이라니. 퇴사를 하고 하나둘씩 정리를 시작했다. 할머니가 아프시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맘 한 편이 너무 불편했지만, 내게는 방법이 없어 종종 나는 우울감에 다시 빠지곤 했다. 다만, 여전히 내게 닿는 볕이 나를 그곳에서 꺼내주었다.





r.png
rr.png


잉글리시 해변, 이날 일어난 산불로 푸른 하늘이 잿빛으로 변해갔지만 내 옆에 든든하게 있어주는 사람 덕에 내 마음의 하늘은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절대 잊지 못할 나의 소중한 사람의 응원으로 나는 밴쿠버라는 따뜻한 둥지를 떠날 준비를 이어나갔다.





a.png
aa.png


다음날 바로 다시 찾은 잉글리시 해변과 그 옆 골목에 있던 독특한 건물. 밴쿠버에 내가 알지 못하고 가보지 않은 곳들이 이리 많다는 걸 깨닫는 순간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옆에 두고 싶었다.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지 않으련. 이곳을 조금 더 눈에 담고 느끼고 갈 수 있도록 말이야.





c.png
cc.png


떠나는 내 마음 무겁지 말라고 그러는 걸까, 아니면 괜찮을 거라고 위로를 하는 걸까. 빠르게 다가온 밴쿠버에서의 마지막 날까지도 날씨는 좋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매일 보고 걷던 이 길을 이제 걸을 일 없다는 게 나를 힘들게 했다. 익숙해져 잊고 있던 소중함을 깨닫고 울음을 터트렸다. 항상 앉아 있던 파티오에서 소리 없이 나는 한참을 울었다. 가고 싶지 않아서, 떠나기 싫어서 밴쿠버를.






t.png


항상 어딘가를 가려면 와야 했던 역, 그리고 나를 안전하게 이동시켜 주던 스카이 트레인.




h.png


내게 평화로움이 뭔지 알려주었던, 집에서 내 방 이외에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파티오.



w.png
rl.png


그리고 내 방.




뭐 하나 뒤로하기가 힘들었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밴쿠버는 굉장히 따뜻한 도시였다. 내 주위에 놓인 푸르고 맑은 것들이 내게 항상 힘을 주었고, 내 주위에 있는 좋은 사람들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내가 뭐라고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고 나를 보듬어준 사람들 때문에 밴쿠버에서의 두 달이 정말이지 잊지 못할 한 편의 영화로 내게 남았다.


글을 쓰느라 오랜만에 사진을 훑어보니 추억들이 떠올라 나를 힘겹게 했다. 나도 모르게 울면서 쓰는 이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와닿을지 모르겠지만, 타지에 와서 오랜만에 타인과 낯선 도시의 사랑을 듬뿍 받아 나라는 사람이 온전히 두 발을 땅에 붙여 나아갈 수 있었다.


앞으로 반복되는 여름 속에서 나는 밴쿠버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거고, 그러면 그 틈에서 만난 모든 이들을 그리워하겠지. 생각만 해도 눈물 나는 모든 것들이 나를 조금은 힘겹게도 하지만 거기서 받은 모든 것들이 나를 나아가게 한다.


밴쿠버는 내게 그런 존재가 되었다.

안녕, 여름

그리고 밴쿠버.


keyword
작가의 이전글6월 하면 떠오르는; Eastern Euro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