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어 다시 보는 엄마됨과 기록에 대하여
출산을 하고 6개월. 상처가 아물고, 달라진 일상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 나는 저 어딘가에 치워둔 노트를 찾아 꺼냈다. 유도분만 24시간 후 응급제왕절개로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수술은 물론 입원도 해보지 않은 내가 3일의 병원살이 후 집에 와서도 몸이 정상화되는 데에는 100일도 훨씬 더 걸렸다. 아이와의 5주는 친정엄마의 도움으로 몸을 회복하는 데에 집중했지만, 그중 첫 2주는 앉아서 자야 했으니, 어떠한 도움도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당연히, 글쓰기와 기록은 나의 우선순위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
2-3시간마다 일어나는 스케줄에서, 매일 기상시간과 취침시간이 얼추 예상가능해지고, 들쑥날쑥했던 낮잠이 매일 2회로 안정권(?)에 접어들 무렵, 나는 엄마라는 새로운 정체성 속에서도 이전의 내가 좋아하고 즐겨하던 글쓰기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아이를 키우면서 기록을 해야지, 늘 다짐해 왔던 터였다. 이것저것 다 기록하던 미도리 a5 노트를 꺼내 다시 끄적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써보지 않았던 포켓 사이즈 6공 다이어리를 사기도 했다. 손에 쥐어지는 맛이 좋은 파일로 팩스. 주일날 예배 시간에 새로운 노트를 펼쳐 메모를 하는 느낌이란. 그리웠던 만큼 좋다.
아이의 지난 6개월간의 모습 중 유난히도 눈에 걸리는 사진들을 고르고 골라 인쇄했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손으로 직접 기록하고 싶은 마음에 b6 슬림 노트를 샀다. 나만의 베이비 스크랩북을 만들고 있다.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과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그냥 스쳐 보내지 말아야지. 그러기에 가장 좋은 도구는 글쓰기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육아와 글쓰기는 참 많이 닮아있다. 초보엄마의 우당당탕 첫 6개월. 이 경험들에 비추어 글쓰기를 바라보니, 웬걸. 걱정할 일이 없다. 이제 내 삶은 완전히 달라져버렸는데 어떤 글을 써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다. 육아가 글쓰기고, 글쓰기가 육아라고 할 만큼 둘은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육아와 글쓰기는 참 많이 닮아있다.
육아를 하는 마음으로 글을 적어나가고,
글을 쓰듯 아이를 키우면 되겠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내게 가장 중요한 일.
이 두 가지가 결국 하나의 접점으로 만나고 있음을 알게 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인투식스 직장생활 시절, 나는 나를 오피스 걸프렌드(!) 삼으려고 하던 직장 선배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인사과에 항의를 하고 매니저까지 끌어들인 상황. 여자 직원보다 남자직원이 훨씬 많은 팀 컬처상, 나보다는 선배의 편을 자처했다. 결국 나는 상황을 무마하려는 매니저의 노력으로 몇 주간 다른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살던 곳과 새로운 일터가 가까워서 출퇴근은 훨씬 수월해졌으나 마음은 1톤 트럭과 맞바꾼 듯했다. 매일 서럽고, 순간순간 분하기 일쑤. 그러나 어디에도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해답이 없었다. 그냥 좀만 버티다가 본사로 돌아가자. 어차피 꼴도 보기 싫은 사람 얼굴 안 보고, 시간이 지나면 마음도 덤덤해질 터였다.
대학 시절 교수이자 졸업 후에는 친구처럼 연락을 주고받던 인문학 수업 교수님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속상함을 토로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 상황의 관찰자가 되어보렴. 그 안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서 나를 한번 바라보라는 조언. 어쩌면 지금의 내가 메타인지에 대해서 그토록 진심인 것도, 나를 돌아보며 남보다도 나 자신을 내성(introspect)하는 일에 더 관심 갖게 된 것도 그의 영향일지 모른다.
그렇게 관찰의 중요성을 배웠다.
글쓰기라고 이름 지어서 뭐가 좀 있어 보이는 것이지, 실은 일기 혹은 혼자와 보내는 시간과 다를 바 없는 기록의 행위. 여기에는 다른 무엇보다 관찰하려는 시도나 의지, 관찰하는 습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관찰에는 가만히 있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 따른다. 인내심 혹은 기다림이 딱 붙어있다. 이들이 없이는 관찰이 불가능하니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진짜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실수들을 해오고 있다. 초반 6개월은 그야말로 들어주기 고약한 즉흥 재즈연주 같았다. 어디서 듣보잡 연주를 배워와서 사람들 앞에서 음악 좀 할 줄 안다고 멋 부리는 그런 느낌. 남이 봐도 어설프고 내가 봐도 못 봐주겠는 그런 육아의 시즌. 그래도 초보라고 용서받고, 처음이라서 귀여운 그런 수준. 그런 딸내미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우리 엄마가 해준 여러 응원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아이를 관찰해 봐, 이다.
너무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아이를 바라보라는 엄마의 따뜻한 격려. 바라보면 알게 되고, 결국 사랑하게 되는 비밀이랄까. 나는 숨을 고르고 아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신없는 혼합수유도, 70만 원짜리 수면교육도, 7개월 차의 단유도, 혼돈의 낮잠 연장도, 무엇을 해내겠다는 도전정신보다 관찰이 선행되어야 했다. 육아는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며, 잘하려 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것도 아니므로.
관찰이라는 창구를 통해 나와 아이가 만나며 우리 사이에 매일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아이가 어려 언어 구사를 하지 못한다고 해도 엄마와 아이는 이미 하나로 연결된 때부터 소통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록도 그렇다. 내 안에 이미 충분한 이야깃거리와 문장, 단어들이 존재하고 있다. 나와 내가 속한 콘텍스트를 관찰하지 않으면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찾아내 꺼낼 수 없다.
관찰할 것.
아이와 친한 엄마. 재밌고 시원한 엄마. 아이를 한 개인으로 존중하며 아이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엄마. 늘 그런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엄마가 되기 위한 한 조건이자 스텝이 바로 관찰임을 육아 초보 6개월 차에 배웠다.
결혼하고 나서 알게 된 지인은 나를 볼 때마다 외모 특히 얼굴에 대한 지적을 한다. 처음에는 큰 불편함을 못 느꼈다가 아이를 낳고 나서 외모 비수기에 접어들자 습관처럼 내게 던져 오는 그녀의 피드백이 더욱 따갑게 느껴졌다.
마음에 자리한 불편한 감정을 걷어내고 싶을 때면 대화하는 친구가 있다. 지금은 대학교에서 상담가로 일한다. 나는 일상이 버거워질 때면 그녀에게 전활 건다. 무료로 전문적인 심리 상담을 해줄 뿐만 아니라 내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긴 설명을 생략해도 되는 그런 친구.
내 이야기를 쭉 듣더니 친구가 말한다. 아마도 특정 인물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면 우선순위를 다시 정해야 한다는, 네 몸이 보내는 사인일 거라고. 특히 육아를 하다 보면 인생의 수많은 선택지 중에 내게 꼭 필요한 우선순위를 정하고 몰입해야만 한다고 했다. 역시, 나보다 16개월 먼저 딸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 다운 조언이다.
아이를 키우며 시간을 쪼개 하루를 산다는 게 무언지 배워간다. 일상의 모든 부분이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계획 또한 아이 위주로 짜고, 시간도 아이 위주로 보낸다. 그러다 보니 남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나를 돌보아야 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잠과 식사다.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는지에 가장 큰 신경을 쏟고, 무얼 얼마나 빠르게 만들어 먹을지 결정한다. 정해진 것은 생각하지 말고 그냥 실행한다. 그렇게 매일매일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글쓰기에도 우선순위를 정하고 정한 일에 몸을 푹 담그는 몰입이 필요하다. 쓰는 것보다 중요한 다른 것이 있다면 글은 잘 써지지 않는다. 그 어떤 것보다 이게 중요해,라고 고집을 부려줘야 한다. 마치 글이 나에게, 너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면 안 되지~라고 바람이 잔뜩 섞인 비음으로 아양을 떠는 것만 같다.
떠오르는 생각이 달아나지 않도록 메모해 두었다가 어느 날 문득 글이라는 게 시작되면, 어딘가에서는 꼭 마무리하게 되는 몰입의 세계로 입장해야 한다. 근성 있게, 강단 있게. 우선순위를 정하고 몰입하는 사람에게만 글이 시작되고 그 글이 완성된다.
첫 세 달은 아이가 커가는지도 모를 만큼 몸이 나약 해져 있었고, 그 이후부터는 삶의 리듬과 방향이 완전히 어긋난 것 같은, 나도 모르게 내가 망가져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지배적이었다. 왜인고 이제와 돌아보니 아이가 생긴 후였지만 나의 우선순위가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로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어서 나도 모르게 내가 가장 중요한데, 아이 위주로만 움직이려니 미칠 노릇이었던 거다. 그 순간 나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나에게 네가, 너에게 내가 가장 소중하지만, 지금 우리의 우선순위는 우리 아들이라고. 그렇게 정해놓자고. 다시 서로에게 서로가 우선순위인 시간이 꼭 다시 올 거라고.
아이가 잘 때 나도 쪽잠을 자고, 아이를 먹이고 나서 나도 먹고. 아이와 산책하는 시간을 무조건 확보하고. 아이와 함께 만나도 마음 편한 친구들을 자주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아이가 힘들면 외출을 삼가고, 아이가 편한 것 같으면 더 밖에 나가고. 이렇게 아이를 내 우선순위에 두고 내 하루 일과를 짜니 신기하게도 내 몸과 마음까지 더 편해졌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곧 9개월이 되는 아기와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제야 아이의 뒤통수를 말없이 바라보는 일이, 아이의 손을 꼭 쥐고 걸음마 연습을 시키는 일이, 똑같은 자장가를 부르며 잠을 재우는 일이, 이유식을 먹이고 얼굴을 씻겨주는 일이 현재의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우선순위를 아이로 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정하고 나니 몰입은 쉬웠다. 나라는 존재가 무어라고 이리도 귀여운 한 아기의 생명줄이 되어버렸는데, 내가 해야 할 일은 처음부터 당연히 몰입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매일 일어나고 밥 먹이고 똥기저귀 갈아주고 낮잠 자게 눕혀주고 씻기고 좀 더 놀아주면 잘 시간. 아이의 생활은 정말 반복의 끝판왕. 엄마가 된 나의 일상도 매일이 지겨우리만치 똑같다. 날이 흐리든 맑든 하루에 1번은 꼭 산책을 나가 바깥공기를 쐬고, 걷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걸음 연습을 시킨다. 아이의 성장 곡선을 따라 비슷한 액티비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 굴레 속에서도 우리만이 알 수 있는 아이의 작은 변화들을 감지할 때면 나의 세상 전부를 뒤흔들만한 강력한 기쁨이 솟구치기도 한다. 물개박수가 저절로 쳐지고, 돌고래 소리도 내지른다. 아, 나의 어여쁘고 대단한 아가야. 네가 너무 자랑스럽다. 아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좀 다른 방식으로 놀았다거나, 매번 넘어지던 구간에서 발란스를 유지한 채 걸어 넘어섰다는 이유로 박수세례 칭찬세례를 받는다.
글쓰기도 우리에게 뻔하고 지루한 루틴을 선사한다. 엉덩이를 무겁게 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어야 하고, 스크린이나 종이를 빤히 째려볼 줄 알아야 한다. 지겹다고 느껴지는 날들도 변함없이 같은 자세를 유지해 줘야 글쓰기가 조금이나마 진행될 수 있다. 잘하는 사람이 매일 연습까지 하면 더 잘하게 되는 것처럼, 굳건한 시스템을 가진 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쓸수록 더 잘 써진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늘 제일 어려운 건 시작이다. 시작되면 지속할 수 있다. (예외도 있긴 하지만.)
그러나 반복하는 건 그다지 즐겁지 않다. 습관을 만드는 길은 꽤 좁은 편이라서 모두가 다 들어갈 수도 없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반복이라는 심심한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꽃을 피워간다. 반복하는 사람만 아주 작은 성장을 재빠르게 눈치챌 수 있기 때문에 하고 있는 사람만 계속해서 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글을 쓰고 있으면 글감이 자꾸 떠오른다. 글을 쓰다 사람을 만나면 대화 속에서 영감을 얻고, 글을 쓰다 산책을 나가면 불현듯 새로운 문장이 찾아온다. 겉으로 보기엔 매일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내면에서는 매 순간 어떠한 가능성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적정한 시간이 되면 폭발할 어떠한 가능성.
아이를 키우는 삶. 그리고 글을 쓰는 삶.
특별할 것 없이 매일이 똑같은 모습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성장과 변화를 맛보다 보면 우리의 사랑은 깊어지고, 문장들은 쌓여간다. 반복할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나의 인생은 너로 인해 더 아름다워졌고, 더 의미 있어졌음을.
누구네 아이는 몇 개월부터 통잠을 자더라. 누구네 아이는 뭘 어떻게 집어 먹더라. 누구네 아이는 말이 무척 빠르더라. 누구네 아이는, 누구네 아이는… 옆집 아들이랑 비교한다고 짜증 냈던 나이면서도 아직 돌도 안된 아이를 옆집 돌도 안된 아이랑 비교하게 되는 이 무시무시한 세상. 잘 재우고 싶고, 잘 먹이고 싶고,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 성급히 비교의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는 건 아닌지. 의사를 만나고, 육아동지들을 만나고, 데이케어 선생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깨닫게 된 건 아이들은 각자가 너무 다르다는 사실이다.
5개월부터 첫니가 난 우리 아들. 또래 친구들은 잇몸으로 이유식을 먹는다는데 이거 너무 빠른 거 아니냐며 오히려 걱정. 친구네 딸은 돌 전부터 마마 마마, 라며 엄마를 찾는다는데, 우리 아이는 아직 엄마를 부르지 않는 걸 보며 두 언어 사용하는 게 너무 헷갈리나 싶어 또 걱정. 자신의 페이스대로 성장하고 있는 아이인데도 다 큰 엄마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 외에 이렇게 가까이 누군가의 생애를 바라보는 것이 처음이어서 모든 것이 불안하기만 하다.
육아를 하던 첫 몇 달은 질문이 너무 많아서 궁금증이 워낙 많은 나 조차도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미드와이프와 의사와의 체크업 시간마다 떨리는 목소리로, 저기 있잖아 이건 괜찮은 거야? 를 남발하곤 했다. 다행히도 내가 궁금했던 많은 것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상적인 내용들이었고.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궁금한 것은 절대 줄어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정답지를 가지고 나에게 촤악, 펼쳐줬으면 했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 아이의 성장과 수면과 식사에 대해 완벽한 답을 줄 수 없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답이 있는 세상이 아니구나. 육아,라는 세상.
글을 쓰면서도 누군가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 마음 가까이에 닿을 문장을 빚어내고, 단어를 고를 수 있는지 알려 주면 참 좋으련만. 지금까지 들었던 조언 중 내게 남아 있는 하나의 조언은 그저 무조건 계속 쓰라는 말. 결국 이 세상 어디에도 글쓰기에 대한 정답은 없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읽고 또다시 읽는 문장들을 보면 작가마다 고유의 관점과 스타일이 있다. 무슨 이유이건 우리는 특정 인물의 서사와 표현을 좋아한다.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고, 모두가 나의 글을 같은 시각으로 바라봐줄 수 없다. 그래서 나만의 이야기를, 나만의 톤으로 기록하는 수밖에 없다. 답이 없는 곳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면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은 낭비되고 만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가 닿는 사람들과의 소통. 그 정도면 충분하다.
답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답이 되어준다. 어차피 가는 세월, 기록이라는 행동 자체에 의미가 있고, 시간이 많이 지나 나와 우리의 그날을 되돌아봤을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지냈는지, 우리가 어떠한 관계의 추억을 남겼는지 되새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만하다. 미래에 서서 오늘을 돌이켜볼 때 우리가 과연 비교라는 걸 하기는 할까. 그저 어린 시절의 우리 아기, 젊은 시절의 나, 를 떠올리기에도 마음이 벅차 비교 따위 하며 시간을 낭비할 어리석음은 없을 것이다.
내게 조금만 더 영감이 있다면 글쓰기가 쉬워질 텐데, 하고 간절히 바랐던 적도 있다. 인풋을 많이 하면 아웃풋도 늘어날 것이란 착각에 숱한 밤들을 유튜브, 팟캐스트, 독서, 영화로 보낸 날도 많다. 가치관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도 시도해 보고, 나와는 완전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과의 만남도 주선해 본다. 생각은 많아지고, 고민은 더 질겨진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영감은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절대 찾아오지 않는다.
그럴 땐, 차가운 공기에 몸을 맡겨보자. 신을 신고 나가 길을 걷는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기보단 자연의 소리, 도시의 소음을 배경음악 삼는다. 몸을 움직이면 신기하게도 생각이 정돈된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걸음걸이에 맞추어 감정도 리드미컬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운동이 우리 몸과 정신에 매우 이롭다는 건 세상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본상식 아닌가.
좀 더 쉬운 육아, 좀 더 덤덤한 육아, 좀 더 간편한 육아, 이런 건 세상에 없다. 그저 내 몸과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방식을 찾게 되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시간이 도와준다. 경험이 쌓이는 만큼 지혜가 늘어나니까. 어려울 때, 피곤할 때,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을 때에도 내가 할 일은 하나. 엄마라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아이를 꼭 껴안는 일. 껴안고 또 껴안아주자. 하루하루 자라나는 아이처럼 나도 엄마로서 자라난다. 육아라는 시즌을 지나면서 어차피 나를 초보에서 경력직이 되고, 어색했던 것들이 자연스럽고 익숙해진다. 요행 같은 건 없다. 지름길도 없다. 그러니 어차피 걸어가는 이 길 위에서 나와 함께 하는 나의 하나뿐인 동반자의 손을 꼭 잡고,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을 표현한다.
세상에 가치 있는 일들은 모두 어렵고 갈등을 일으키고 나를 불편하게 한다. 쉬운 일은 쉬운 만큼 가볍다. 잊히기도 빨리 잊히고, 갑자기 없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은 별로 아쉽지 않다. 누구에게나 왔다 갔다 하는 쉬운 일이라서 그렇다. 의미 있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만남, 일, 경험들은 적응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쩌면 평생을 걸려도 전체를 다 이해했다 할 수 없을 만큼의 미스터리함을 지니고 있다. 가족관계가 그렇고, 육아가 그렇고, 우정이 그렇고, 신앙이 그렇고, 업이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그런 일들과 씨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육아를 하면서 최대한 루틴을 만들고자 나만의 스케줄을 짜고 시스템을 만든다. 모두가 도움이 되는 시도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쉬워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인생을 처음부터 함께 걸어가는 이 여정은 어느 날 내게 무거운 책임감으로, 무서운 죄책감으로, 살 떨리는 의심과 불확실함으로, 한없는 미안함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부모 됨이라는 과제. 이 모든 것들을 지나는 과정에서 나는 깊어지고 넓어진다.
나 자신의 미련함에 속지 말자.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시간과 노력을 쏟지 말자. 쉬운 길, 쉬운 방법, 이런 건 결코 없으니 착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글을 쓰고, 마음을 한껏 쓰면서.
아이를 기르고, 내 마음도 깊이 기르면서.
마음껏 사랑하고, 많이 사랑받으면서.
그러다 보면, 나에게도 여유가 생기겠지. 자연스러워지겠지.
처음 만난 누군가 나를 보면 아, 저 사람은 기록하는 사람이구나, 아이를 기르는 엄마구나,라는 생각이 바로 들만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