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막례 할머니 다이어리 감상평
최근, 한 유튜브 영상이 페이스북을 뜨겁게 달구었다. 지인 중 몇이 좋아요, 를 누르다 못해 공유를 해주어서 나의 타임라인에 까지 나타난 이 영상은, 생전 처음 보는 박막례 할머니라는 분의 메이크업 투토리얼 영상이었다.
치과 들렸다 시장 갈 때 메이크업 [박막례 할머니] Grandma Make up, 이라는 제목에 나도 모르게 홀린 듯 그녀의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호주 여행기에서부터 가장 최근 영상까지 한 번에 완주했다. 댓글을 달고, 엄지손가락과 구독 버튼을 눌렀다.
동생에게 카톡으로 박막례 할머니의 영상을 보내주고, 잠시 집에 들른 엄마에게도 할머니를 소개했다. 이렇게 몇 번이나 할머니의 영상들을 반복 재생하다 보니, 나는 콘텐츠가 넘쳐나는 이 시대, 진정한 크리에이터가 가져야 할 자질을 배울 수 있었다.
박막례 할머니의 유튜브의 시작은 바로 호주 여행이었다. 이 여행은 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 여행길에 오른 손녀 김유라씨 덕분에 가능했다.
영상 촬영 때문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손녀를 향해, 바닷속에 있는 자신을 누군가가 더 밀어냈다며 억울한 표정으로 푸념하는 할머니. 곧바로 이어지는 헬멧 다이빙 장면에서는 바닷속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들을 보고 나서 그 경험에 황홀해하는 박막례 할머니가 있다. 스노클링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헬멧 다이빙을 안 했으면 어쩔뻔했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바닷속. 그리고 그 속을 헤엄치길 참 잘했다며, 호주의 아름다운 대자연과 그 앞에 용기를 낸 자신에게 감동하던 그녀의 모습.
살아온 인생이 70년이 넘었건만, 세상에 너무나 많은 것이 모두 다 처음일 박막례 할머니.
누군가에게는 매년 떠나는 여행 중 한 여행, 많고 많은 도시 중 한 도시, 지겹도록 헤엄쳐보았을 바다 중 한 바다 일지 모르는 곳에서 그녀는 감동했고, 그 감동은 보는 사람마저 감동시키는 엄청난 에너지를 지녔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삶을 타인과 공유하는 크리에이터는 아주 작은 일상의 요소에도 진심으로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초콜릿을 만들던 박막례 할머니. 패키지 안에 들어있던 도구를 사용하다가 어릴 적 엄마 몰래 쌀을 담던 쌀주머니 이야기를 꺼내신다. 영상 편집을 하는 할머니의 손녀딸은 상황에 어울리는 음악과 자막을 이용해서 영상의 감성적인 순간까지 놓치지 않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하나의 영상에는 크리에이터의 현재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까지도 담겨있다. 보여주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역할이 구분되어있는 유튜브와 같은 소셜미디어의 경우, 언뜻 보면 서로가 맡은 일이 한정적인 것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콘텐츠 안에도 소통이 있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하는 소통과, 몸은 떨어져 있을지언정 영상이라는 매개체로 연결되어있는 크리에이터와 컨슈머가 기억과 순간을 나누는 소통.
크리에이터는 콘텐츠를 만드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 콘텐츠를 소모하는 관객들과, 지금의 본인을 있게 한 과거의 모습까지 되돌아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에게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밀며 할머니의 가방을 공개하겠다는 손녀딸 유라씨. 그런 그녀를 의심의 눈빛으로 쳐다보던 할머니는 곧 가방을 공개해야 하는 순간이 닥쳐옴을 직시하게 된다. 아무래도 껄끄러운 기운이 가시지 않아 그녀는 앉은 채로, 가방을 옆에 두고, 손녀딸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한다.
이미 유명 연예인들과 유투버, 블로거들이 만들어낸, 그래서 유행의 대열에 올라선 콘텐츠라고 한들, 정말 사람들이 나의 가방 안을 궁금해할지, 이게 재미있는 나만의 콘텐츠가 될는지 질문하는 모습. 함께 작업을 하는 손녀에게 묻고 또 묻는 모습. 다른 이들은 카메라 밖으로 숨기곤 하는 아이디어 회의의 모습이다. 그리고 박막례 할머니는 수많은 질문이 오가야만 하는 브레인스토밍마저 카메라 앞에서 한다.
크리에이터는 질문하는 사람이다. 모두가 다 좋아하는 콘텐츠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만들어내기보다는, 나만의 콘텐츠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의심도 해보고, 정말 이 이야기가 보는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다가설 수 있을까 고민도 해본다. 평범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의 시작에는 질문 만한 게 없지 않은가.
처음으로 카약 타기에 도전한 할머니와 유라씨. 처음은 모든 게 어색한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처음이라고 해서 즐기지 말란 법은 절대 없다. 방향을 잡지 못해 배가 산으로 흘러간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일지 모른다.
호탕한 웃음으로 당황할법한 상황에 유쾌하게 대처한다. 지나가던 사람, 함께 카약을 즐기던 사람이 곧 다가와서 구출해준다. 위기는 모면되고, 경험은 추억이 된다.
크리에이터의 삶이 포장된 도로처럼 부드럽고, 고속도로처럼 뻥 뚫려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때론 회의감에 빠질 수도 있고, 아이디어 고갈의 늪에서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무력감이 들 수도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업 Up이 있으면 다운 Down이 있는 법. 하지만, 그럴 때마다 좌절하며 포기하기보다는, 주변에 도움을 구하는 편이 훨씬 낫다. 카약이 처음이라서 부끄러운 마음 때문에 소리치지 못했다면, 아마 박막례 할머니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힘겹게 수영을 하거나, 오랜 시간 눈물을 삼키며 카약 안에 갇혀있어야 했을 것이다.
도움을 구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 걸 아는 사람. 예상하지 못한 위기를 큰 웃음으로 넘어가는 사람. 진정한 크리에이터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태어나 처음 파스타를 먹어본다는 할머니는 포크로 파스타를 휘저으며 꼭 라면과 같다고 말하신다. 요즘 애들이 먹는 것, 요즘 애들이 하는 것, 요즘 애들이 만드는 것이 박막례 할머니만의 콘텐츠가 되어 수많은 이들에게 공유되는 이유는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도전정신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평생 해오던 것을 다시 하는 것을 도전이라 말하지 않는다. 태어나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 내가 이 것을 해보리라고는 상상해보지 못한 그런 것들을 시도하는 것을 도전이라고 부른다.
화이트데이를 맞아 막대사탕 몇 자루를 쥐고 자이언티의 '꺼내 먹어요'를 부르다던가, 생애 첫 요가 포즈를 취해본다던가, 처음으로 밸런타인 기념 초콜릿을 만들어본다던가, 하는 작은 도전들이 곧 콘텐츠가 되는 시대. 그런 시대에 걸맞은 할머니의 도전정신. 그 정신이 바로 그녀를 크리에이터로 만들어준다.
나 또한 지금껏 최고의 시트콤이라 칭하는 작품은 박경림 주연의 <귀엽거나 미치거나>이다. 연기자 김수미와 그의 남편 역을 맡은 김성원의 개그 콤비가 인상적인데, 박막례 할머니는 한 영상에서 김수미 역할을 시도한다.
이 영상의 제목 또한 할머니의 첫 연기 배우기! 인데, 할머니 나이 (낭랑 71세)에 '배우다'라는 동사를 쓴 것이 매우 인상 깊다.
사실은 박막례 할머니의 유튜브 채널 전체가 '배움' 그 자체이기도 하다. 첫 호주 여행, 첫 초콜릿 만들기, 첫 영화 리뷰, 첫 연기 도전... 살아오는 지금까지 우리는 삶의 모든 것을 배우고, 습득해왔다. 어떤 것은 시간이 오래 걸렸고, 또 다른 것은 쉽게 습관이 되었다. 어릴 적 분주하고 적극적이었던 생활은 나이가 들면서 정체되어가고 단조로워진다. 나라는 사람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데, 달라진 거라고는 나이가 들었다는 것뿐인데 생활의 모양이 변해간다. 이 변화의 가장 큰 이유는 멈춰진 '배움'에 있다.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그 무언가.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게 하는 에너지와 더 나은 나를 꿈꾸게 하는 힘.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크리에이터는 배움의 열정을 전달하는 사람이고, 그 배움의 열정은 보는 이들에게 분명히 전달되는 영감이 되어준다..
자신의 모습이 우스울 때에, 무언가가 생각한 것만큼 쉽게 풀리지 않을 때, 박막례 할머니의 호탕한 웃음이 들려온다. 손녀와 함께한 여행길에서, 못생긴 라이언의 얼굴을 마주한 부엌에서, 영 어색한 요가 포즈를 취한 거실에서, 여느 뷰티 유투버 못지않게 깨끗한 배경을 한 영상 속에서 그녀는 환하게 웃는다.
오랜 세월 식당일을 해온 탓에 두꺼워진 손톱 모양은 그대로이다. 변한 건 없지만 그녀는 웃을 수 있다. 이제는 지금 것 살아온 박막례라는 이름 뒤에 크리에이터라는 새로운 타이틀이 붙었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터의 삶은 없던 것을 창조하는 삶이다. 웃음이 메마른 일상에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생겨나고, 도전이 없던 인생에 두렵지만 용기를 내보는 걸음 하나가 내디뎌진다. 할머니라는 정겨운 이름에, 크리에이터라는 멋진 직업까지 더해져, 박막례 할머니 크리에이터라는 웃음이 절로 나는 새로운 인생의 2막이 시작되었다.
어떤 날은 콘텐츠 아이디어가 마구 떠오르다가도 다음 날은 잘 하던 모든 게 갑자기 안 풀릴 수도 있다.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많은 요소들이 하나의 삶을 끌어가고 있다. 크리에이터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렇지만, 웃어보자. 생각하는 대로 풀리는 게 인생이라 했다. 기분이 꿀꿀한 낮에도 좀 더 편안한 저녁을 꿈꿔보자. 더 나은 삶을 원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욕심이다.
웃을 수 있는 크리에이터, 그 웃음은 보는 이들에게 전염될 것이고, 그 웃음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박막례 할머니의 영상을 처음 본 건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한 번으로 부족해서 다시 재생한 박막례 할머니의 호주 여행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었다.
처음에는 그저 한국에 계시는 나의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박막례 할머니의 구수한 말투가 너무 재미있어서 자꾸만 영상을 틀게 되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박막례 할머니의 영상에 깊이 영감을 받은 이유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쉽게 눈치챌 수 있는 것보다 마음과 시간을 들여야만 눈치챌 수 있는 것들 때문이었다.
현재 활동하는 유투버들보다 훨씬 인생 경험이 많은 그녀의 지긋한 나이 때문도 아니고, 서울이 아닌 지방색이 강하기 때문에 욕마저 정감 있게 들리는 시원시원한 사투리 때문만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다 깊은 곳으로 밀었다면서 힘든 표정을 지으실 때나, 헬멧 쓰고 들어간 바닷속에서 만난 물고기들이 너무 신기하다며 감동의 눈빛을 하실 때, 나는 그녀의 진심에 감명받았고, 그 진심을 전달하는 바닷물처럼 투명한 그 마음에 동요되었다.
나만의 목소리를 갖는 것, 그리고 그 독특한 목소리로 나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 이들은 어떤 학교에서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들이다. 내가 해봐야만 알아지고, 꾸준히 반복해야만 내 것이 되는 것들이다.
아이이던 시절, 잠에 들기 전 따뜻한 품 속에서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 옛적 이야기를 나의 자식들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은 이유, 찌질이 대학생 시절, 늦은 새벽마다 듣곤 했던 이소라의 5집 앨범을 아직도 애정 하는 이유는 그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이야기에 나의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일 거다.
주제보다,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멈추게 하는 것보다는 움직이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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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ver image and caption images by 박막례 할머니 (Grandma's di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