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되, 무너지지 않는 마음
<영화 줄거리>
12살 해성과 나영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나영이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헤어진다. 12년 후, 해성은 페이스북에 나영이를 찾는 글을 올리고 나영이가 답장 메시지를 보내며 연락을 주고받는다.
24살이 된 나영은 뉴욕에서 연극 작가로, 해성은 한국에서 대학생으로 지내며 낮밤이 다른 시차에도 불구하고 매일 영상통화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영은 현실에 집중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해성에게 연락을 멈추자고 말한다.
그로부터 다시 12년이 더 흘러, 나영은 백인 남편 아서와 결혼 7년차를 맞는다. 한편 해성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뉴욕으로 휴가를 떠난다. 36살이 된 해성과 나영은 24년만에 뉴욕에서 재회한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여운이 깊은 작품이다. 결말이 뻔하지 않고, 나영과 해성 모두에게 감정이입이 된다. 특히 성인이 되어 뉴욕에서 다시 만난 둘의 대화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만약 나였다면 그 질문에 뭐라고 답했을까?
해성(유태오)은 말수가 적고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인물이다. 속마음과 달리, 이민을 떠나는 나영에게 퉁명스레 "잘 가라"고 말하고 가버린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영상통화로 이별을 고하는 나영에게 또다시 "잘 가라"고 말한다.
반면 나영(그레타 리)은 감정에 솔직하다. 엄마가 "요즘 학교에서 누가 좋아?"라고 질문하자 주저 없이 "해성이"라고 대답한다. 왜 좋은지를 물으니 "남자다워서 좋아"라고 말한다.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생각을 분명하게 전하는 인물이다.
나영은 뉴욕까지 자신을 보러 찾아온 해성에게 묻는다. "12년 전에 왜 나를 찾았었어?"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해성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냥 한번 보고싶었었다고. 그런 그에게 "그때 우리 진짜 애기들이었잖아"라며 아주 어릴 적 과거임을 넌지시 표현하지만, 해성은 "24살 때도 여전히 애기들이었지"라며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내비친다. 그 말에 나영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이제는 애기가 아니지"
영화 전반부는 제3자의 시선으로 구경하듯 보게 되지만, 여기서부터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그들의 처지였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몰입하게 된다. 상대가 원치 않는 말을 계속했던 경험, 내 마음과 같을 거라 착각했던 일, 나와는 감정의 상대를 마주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집으로 돌아온 나영은 남편 아서에게 말한다. "당신 말이 맞았어. 날 보러 온거야"라고. 해성은 뉴욕에 온 김에 나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영을 보기 위해 뉴욕까지 온 것이다.
나영은 아서에게 전형적인 한국 남자라며 해성을 설명하고 즐거워한다. 그러자 아서는 그가 매력적인지, 그에게 끌리는지 묻는다. 그런 아서에게 다가가 나영은 대답한다. 어릴 때 기억 속에 존재했고, 컴퓨터 화면으로만 있었는데, 실물을 봐서 강렬한 감정이긴 하지만 끌리는 것은 아니라고. 서울이 그리웠다고.
나영과 아서는 취향도 관심사도 비슷하다.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일상을 공유하는 부부다.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나영은 이토록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아서는 불안하다.
예술인 레지던시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아니었어도 나영은 다른 누군가와 잘되지 않았을까, 돈을 아끼기 위해 동거했고, 영주권이 필요해서 나와 결혼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의 조각들을 나영에게 꺼낸다. 아내가 한국말로 잠꼬대 할 때, 이해할 수 없는 언어처럼 자신이 가닿을 수 없는 아내의 무의식이 있는 건 아닐까 느꼈었다고.
'만약에'로 이어지는 질문들에 지칠 법도 한데, 나영은 그 의미없는 가정들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보통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라고 여러번 말하고도 남았겠지만 나영은 그가 충분히 말할 때까지 계속 듣는다. 그리고 대답한다.
"여기가 내 종착지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해성이 떠나기 전날, 세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는다. 아서가 서툰 한국말로 인사한다. 해성도 서툰 영어로 대화를 이어간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해성과 나영은 한국어로 둘 만의 대화를 나눈다. 마지막임을 알기에 해성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꺼낸다.
해성 : 네가 이민을 가지 않았더라도 내가 널 찾았을까, 우리가 같이 자랐다면 사귀었을까 헤어졌을까... 근데 이번에 와서 확인한 사실은 너는 너이기 때문에 떠나가야 했어. 그리고 널 좋아한 이유는 너이기 때문이야. 네가 누구냐면 떠나는 사람인 거야
나영 : 네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근데 그 어린 애는 존재했어. 네 앞에 앉아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야. 20년 전에 난 그 애를 너와 함께 두고 온 거야
해성에게 나영은 여전히 특별했지만, 나영에게는 아서가 이번 생애 함께할 인연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해성은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나영이 해성을 대할 때 일관되고 분명했던 이유도 그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시간 비행기를 타고 자신을 찾아온 해성에게 헷갈리지 않도록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어릴 적 나영은 자주 우는 울보였고 그럴 때마다 해성은 곁을 지켰다. 그러나 이민을 간 뒤로 나영은 한번도 울지 않았다고 한다. 이민 온 이방인이 울 때 위로해줄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 약해 보이기도 싫었을 것이다. 그랬던 나영이가 해성을 배웅하고 돌아서며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그 옆에서 아서는 아무 말없이 나영을 위로한다.
이제 나영은 울고 싶을 때 아서 곁에서 울 수 있을 것이다.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하고 위로할 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흔히 성숙함을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 착각하지만, 진짜 성숙함은 흔들리지만 선을 넘지 않는 것. 자신의 나약한 면을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진심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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