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발산만으로 의미가 있다

by 써드

‘꽃이 필 때 하늘에 월세 내고 피나. 그냥 터뜨리고 보는 거지.’


말이 안 통한다는 게 가장 큰 애로사항이었던 관계에서 처음으로 큰소리를 냈다. 말의 논리는 대화를 무겁고 차분하게 하지만 맨틀 아래에서 이글대는 감성, 그 핵의 논리로 접근하면 그저 내지르는 것만으로도 갈등이 휘발된다는 것을 깨달은 아침이었다. 더불어 눈물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카타르시스인지 율리시스인지 모를 순간이었다.


“저는 이제 과장님과 겸상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날 이후로 줄곧 혼자 밥을 먹었던 퇴사 직전의 직장생활이 있었다. 문제는 입밖으로 꺼내든 속으로 다짐하든 그런 일들이 꽤나 오래 반복되어 왔다는 점이다. 갈등의 상대가 주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이었다는 점은 또 다른 연구 주제이지만 일단 겸상 포기, 이직처 물색, 퇴사라는 긴밀한 연결고리는 내 삶을 관통하는 악습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오래 눌러온 화를 ‘마지막’을 상정하고 터뜨리는 순간 상대는 당황을 하고 나는 최후까지 이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기승전결은 내 마음속에서만 정립되었을 뿐이었다.


갈등을 싸움이라는 드라마틱한 쇼로 선보일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선뜻 따라하고 싶지 않은 귀한 재능이다. 물리적 폭력이 동반되는 일은 물론 지양해야겠지만 ‘저 사람이 어떤 맥락에서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제3자가 알게 하고 나의 분노를 설득시키는 일련의 과정은 사회생활에 꼭 필요하다. 년이니 놈이니 할 것도 없이 신경전을 티나게 펼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끙끙 앓기만 했다. 집에 돌아와 소주 한 병을 끼고 안주 삼아 배달음식을 폭식하는 것으로 설움과 분노를 푸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길을 걷다가도 빠르게 스쳐가는 차에다 대고 쌍욕을 날리는 사람을 인생의 한 시기에 꽤 가까이 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심하기만 했다. 왜 저렇게 모든 일에 파르르일까. 나처럼 좀 신사적으로 살면 안 되나?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자니 순간순간 화를 터뜨리고 난 뒤 정작 자신은 평정심이라는 순도를 유지하면서 지내는 모습이 지독하게 이기적이지만 한편으로 현명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정반대의 미덕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물과 불이 만났다. 그러자 나는 전투 본능에 눈을 뜨게 되었다. 왜 진작 이렇게 대들고 따지지 못했을까.


“그렇게 살지 마.”

“너나 그렇게 살지 마.”

“내가 뭘 했는데?”

“웃기지마.”


언어의 온도가 끓는점에 도달하면 그때부터 어른의 싸움은 유아기로 퇴행한다. 굳이 일일이 상대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뭘 잘했는지 열거할 필요도 없다. 나는 오늘 그렇게 싸웠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 ‘저녁 먹었어?’ 하며 안부를 묻는 대화로 돌아온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물론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이 시절인연을 잘 단도리해야 내 인생에 똑같은 참사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다.


아버지는 정색의 대가였다. 한번 거슬리는 게 있으면 풀릴 때까지 남은 가족들이 한동안 눈치를 봤다. 그렇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미묘한 기류의 변화를 감지하게 해 주위를 고요하게 긴장시키곤 했다. 나 역시 아버지의 정색을 물려받았기에 ‘갑자기 왜 저래?’ 하고 어리둥절하게 얼어붙은 사람들이 내 곁을 많이 떠나갔다.


이제는 알게 하리라. 다짐해 본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는 말은 이제 내 안에서 시효가 지났다. 쉭쉭 하고 마음 근육을 움직여 쉐도우 복싱을 해 본다. 나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것들을 향해 활짝 피어서 나를 증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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