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과(1)
양산, 읽을 책 한 권, 샤프와 볼펜, 손수건, 현금 조금, 부채 하나...
걸어서 5분도 채 안 되는 곳에 가면서, 나는 작은 에코백에 짐을 한가득 챙겼다.
끝나고 카페에서 책을 읽을 생각으로 몇 달 전 읽다만 책도 넣고 집을 나섰다.
평소와 달리 유난히 상기된 얼굴의 미술학원 원장님께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설명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1년 가까이 다니고 있는 미술학원이 확장이전하면서 설명서를 열었다. 원장님은 설렘과 자신감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나를 그 자리에 초대했다. 열댓 명 정도 되는 엄마들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제는 어딜 가나 습관이 된 '나보다는 다들 어리겠구나'하는 스스로의 노산 확인을 거친 후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간단한 소개가 이어지고, 미술학원 브랜드의 대표라는 50대 후반정도 돼 보이는 원장님이 강의를 시작했다.
표정, 말투, 눈빛, 제스처 하나까지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능숙한 장사꾼'느낌이 물씬 났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상대하는 일을 30년 이상 하면 저런 이미지가 생기는 걸까, 저분만 유독 저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장이전이라는 선택을 한 원장님을 칭찬하고 격려하며 모인 엄마들에게 박수를 쳐 달라고 했다. 박수를 치면서도 묘한 마음이 들었지만, 뭐 축하할 일이니까.
강의는 재밌었다. 현재 교육 트렌드와 미술학원이 갖고 있는 지향점, 아이들의 특성과 미술교육을 어떻게 접목시켜서 학부모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등 기억할만한 내용이 꽤 있었다. 그리고 '미술은 실수해도 된다'라는 말이 뭔가 안정감을 줬다. 강의가 끝나고 행운권 추첨(수강료 할인)이 이어졌다. 내 옆에 있던 두 사람, 내 뒤에 있던 한 사람 이렇게 세 명이 행운을 안았다. 모두에게 챙겨준 물 한 병과 간식을 들고 서둘러 나왔다.
미술학원 1층에 있는 카페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책도 가져왔고, 시간도 적당하고, 온 김에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가 매우 적절한 타이밍인데... 망설여졌다. 괜히 커피값도 아까운 것 같고, 의자도 불편한 것 같고 뭐 등등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해가 쨍쨍 일 줄 알았는데 그늘이 시원하게 드리워졌고 부채도 양산도 꺼낼 일이 없게 됐다. 종종걸음으로 3분 정도 걸어 마트에 들어갔다. 마침 사려던 두부가 990원으로 세일을 하길래 두 개 집어 들고, 닭가슴살을 사서 나왔다.
집에 와 가방을 정리하는데 그 많던 짐들 중 손수건 하나만 달랑 쓰고 온 게 어이없어서 웃음이 새 나왔다. 없는 것보다, 아쉬운 것보다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게 나는 맘이 편하니까. 어차피 다음번도, 그다음번에도 나는 짐을 한가득 싸들고 또 외출할 거란 생각에 이게 그렇게 비효율적이란 맘은 들지 않았다.
냉장고를 열어 빨리 먹어야 할 것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콩나물무침, 시금치무침, 구운 삼치, 오이, 김치볶음밥까지. 전부 조금씩 남은 것들이다. 주섬주섬 점심을 챙겨 먹고 냉장고 정리를 했다. 모든 식재료들이 다 내 눈에 보이게 앞으로 옆으로 요리조리 쌓아서 한눈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열 번도 더 깨다 잠들다, 잠에 취한 것처럼 1시간 정도 낮잠에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집에서 나 혼자, 방해할 사람도, 귀찮게 할 일도 없는데 이상한 불편함과 스트레스를 마주하며 나는 또 나만의 하루를 다 보냈다.
이제 곧 4시가 되고, 나는 내가 아닌 엄마로 아내로 머무는 시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