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마음 (17)
가을이 오면 꼭 생각나는 간식이 있다. 삶은 땅콩이다. 가을 운동회를 하는 날이면 어느 집 할 것 없이 돗자리 위에 삶은 땅콩이 꼭 있었다. 줄다리기, 달리기, 콩주머니 던지기 등 한바탕 힘을 쏟고 나서 먹는 음식이라면 뭐든 다 맛있겠지만 나는 특히 삶은 땅콩을 좋아했다. 김밥, 밤, 사과, 좋아하는 과자 등등 다 제쳐놓고 딱딱한 껍질을 톡 까서 촉촉하고 담백한 땅콩 두 알을 입에 쏙 넣으면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가을의 맛이기도 했고, 운동회의 추억이기도 했고, 엄마가 챙겨주던 정성이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만 먹던 것도 아니고, 우리 반 친구들 대부분이 가을이면 먹던 간식, 운동회날 엄마들이 꼭 싸 오던 간식이었다.
삶은 땅콩은 껍질 때 삶아서 까먹는 것인데, 껍질 속에 적당한 수분을 머금고 있어서 촉촉하고 담백하고 고소하다. 볶은 땅콩은 사실 먹다 보면 목마른 맛이 나지만, 삶은 땅콩은 끝까지 촉촉하게 먹을 수 있다. 한참이나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삶은 땅콩은 경상도에서만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 어떻게 다들 이 맛있는 걸 안 먹어봤단 말이지, 운동회날 다들 어떤 간식을 먹었던 거지, 나는 삶은 땅콩을 먹지 않고 보냈던 가을이 없었는데... 하며 의아했었다. 대학에 오면서 나는 경상도를 떠나 살았고, 난생처음으로 삶은 땅콩을 먹지 않고 가을을 보내기도 했다. 주변에서 삶은 땅콩을 먹는 사람을 본 적도 없고, 이야길 하는 걸 들은 적도 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단 가을 간식이 그렇게 나의 가을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서너 해 전인가, 아빠가 조그만 밭을 일구기 시작했고 거기에 땅콩과 고구마를 심었다. 첫 수확을 해서 아빠는 작은 상자에 땅콩과 고구마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바로 땅콩을 삶았다. 촉촉하게 물기 머금은 땅콩을 톡 까서 입으로 쏙 넣자, 어린 시절의 가을이 되살아났다. 운동회도 생각났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삶은 땅콩을 먹던 어느 가을 저녁도 떠올랐고, 냄비 가득 삶은 땅콩이 담겨있던 엄마의 부엌도 눈앞에 그려졌다. 아빠의 작은 밭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땅콩을 수확했고, 아빠의 가을선물은 해마다 나에게 도착했다. 나는 어릴 때처럼 매해 가을, 삶은 땅콩을 먹으며 보낸다. 삶은 땅콩을 먹다 보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우리 가족이 살던 마당이 있던 너른 집도 그리워지고, 할아버지가 자전거 가득 싣고 오던 땅콩도 그리워지고, 엄마가 갓 삶은 땅콩을 냄비 째 들고 오던 모습도 그리워지고, 운동회의 함성, 기억이 가물가물한 친구들의 얼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던 작은 운동장까지... 오래전 그날의 기억들이 또렷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 기억들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따뜻하고 포근했던 그 기억들이 오늘도 나를 다독인다. 삶은 땅콩 하나가 참 멀리도 갔다. 30여 년 전 작은 운동장으로, 우리 가족이 살던 오래된 집으로, 나를 멀리도 데려간다. 어제의 기억이 나를 다독이는 이런 순간이 나는 참 좋다. 납작했던 오늘의 마음이 어제의 기억으로 몽글몽글 부풀어 오른다. 어제의 쓸모는 이런 다독임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