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지훈이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헸다.
"그럼~ 얼마나?"
"생활비가 다 떨어져서 100만 원 만 해주면 내가 월급 받으면 금방 갚을게"
"그래.. 빚 갚느라 고생이 많다. 너무 무리해서 갚으려고 하지 말고 부모님 빚 먼저 갚고 숨통 트이면 갚아."
"그래 고맙다. 연준아"
"예전에 이체했던 계좌로 이체하면 되지?"
"아니 거기로 하면 계좌가 압류되어서... 카톡으로 보내줘"
"응.. 그래 카톡 계정 보내줘"
"지훈아 우리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술 한잔할까?"
"술.... 나 술 마시면 안 되는데..."
"뭐 어때? 가볍게 둘이서 한 병씩만 딱 먹고 헤어지면 되지"
"아니 사실 이렇게 된 것도 술도 한몫 했는데.. 술은 좀 나중에 마시고 우리 만화방갈래?"
"만화방? 무슨 대학생도 아니고 아직도 만화방이 있어?"
"응 너도 학교 다닐 때 자주 갔잖아? 요즘은 깔끔해져서 좋아"
지훈이를 따라서 만화방으로 들어갔다. 대학생 이후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만화책들을 다시 읽으니 대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학생 때와는 이제는 직장인이 되어 학교 다닐 땐 큰맘 먹고 끊던 정액 권도 커피 한잔 가격이었고 시켜 먹는 라면도 참고 참아 집에 가서 먹었지만 이제는 저녁도 짜장면도 시켜 먹으면서 대학교 시절 에는 낼 수 없던 기분을 냈다. 몇 시간이나 만화책을 보다가 배도 부르고 깜박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시계를 보니 벌서 열두 시를 넘겼다. 지훈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기지개를 켜고 읽다만 만화책을 다시 읽으려 했다. 대학생 때는 앉은자리에서 몇십 권이고 읽었던 것 같은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집중력이 떨어지다니 새삼 슬펐다.
그리고 이제는 만화 속 주인공들과 내 나이가 너무 많이 차이가 났다. 15세,... 16세... 내 나이의 반도 안 되는 주인공들에게 몰입이 안되었다. 딱딱한 의자에 몸도 배기고 중국 음식이 더부룩해서 슬슬 온몸이 불편해졌다. 집에 가는 게 어떨까 하고 지훈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훈아 어디야? 나는 슬슬 가려고..]
한참을 답이 없었다. 어디 다른 소파에서 자나?라는 생각이 들어 만화방을 둘러보았다. 몇몇 대학생들이 열심히 만화책을 읽고 있었고 싼 가격에 밤을 보낼 생각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지친 행색의 사람들이 불편한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
소년 만화 코너를 지나 무협지들과 성인 만화가 있는 다소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더 퀴퀴한 냄새와 무채색 옷을 입은 더 연령대가 높은 사람들이 무협지를 깔아 놓고 읽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옛날 문방구 오락기계 같은 작은 게임기가 있었다. 지훈이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지훈아 뭐 해?"
"어? 연준아 흐흐 이거 게임 별 것도 아닌데 재미있다."
"뭔데?"
"아 이거 가위바위보 게임인데 한판에 천 원이야"
"그냥 가위바위보 하는 거야?"
"응 배팅 높을 때 이기면 코인 10배로 딴다."
"코인?"
"응 카운터에서 상품권으로 바꿔준대"
"아.. 많이 땄어?"
"엉 지금 한 5만 원 땄어 흐흐 상품권 교환 가능이네 10만 원 만들고 일어나자"
"어 그래 나는 만화 좀 더 보고 있을게"
지훈이는 나한테 눈도 마주치지 않고 게임기에 몰두했다. 얄궂게 생긴 가위바위보 전구에 불이 들어오며 게임이 시작되었다. 디지털 시대에 꼬마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게임이라니 레트로 감성도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자리에 와서 만화책을 몇 권인가 더 보하다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보니 지훈이는 여전히 게임 중이었다. 말을 걸었지만 지금 한참 따는 중이라고 먼저 가라고 했다. 혼자 짐을 챙겨 나왔다. 새벽 공기가 쌀쌀했다. 지훈이 상태가 걱정이 되긴 했다. 하지만 나도 가끔 밤새 게임을 하기도 했고 술을 마시는 것보단 건전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네가 잘했다는 거야?"
"오빠가 먼저 약속 갑자기 파투 냈잖아!"
"그래서 약속 파투 내면 남자랑 단둘이 술 마시러 가도 되냐?"
"내가 얘기했지 회식하고 원래 부장님이랑 김대리 셋이 남았는데 부장님이 그냥 조금 일찍 갔을 뿐이라고?"
"X발 김대리? 김대리 그 새끼 한데 전화 걸어 걸으라고!"
"뭐? 오빠 지금 뭐라 그랬어? 지금 욕했어? 나한테?"
"야 지금 욕한 게 중요해 전화기 내놔 X발 그 새끼한테 당장 전화 걸어"
"지금 몇 시인데 전화를 걸어!"
"X발 그게 중요해? 지금 사람이 배신을 당했는데? 지금 내가 쪽팔리냐?"
지훈 오빠의 눈빛에 광기가 어렸다. 무서운 감정보다 억울하다는 감정이 더 컸다. 사실 지금까지 집이 어렵다는 핑계로 데이트 비용도 다 내가 내고 있었다. 오빠가 또 부모님 집에 대부 업체가 와서 가봐야 된다고 했을 때 사실 조금은 기뻤다.
오빠의 불행이 오빠 탓은 아니지만 얼마 만에 잡은 데이트 약속인데 이렇게 차려입고 또 오빠의 눈치나 보면서 우중충한 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박 부장이 와인 번개를 때렸을 때 아무도 지원자가 없어서 취소될 뻔했다. 하지만 내가 자원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모임이 커졌다.
구질구질한 얘기 빚 갚는 얘기 돈 빌리는 얘기, 일확천금한 말도 안 되는 얘기들 그리고 오빠가 갚는다며 빌려간 돈들을 떠올리며 금요일 밤을 보내기 싫었다. 그냥 예쁘게 차려입은 금요일을 재미있게 즐겁게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오빠 우리 그만하자."
"X발 역시 맞네.. 그 새끼랑 눈 맞았네... 야.. 전화기 줘바"
"전화기는 왜! 미친 거 아냐?"
"야 전화기 안 줘? 안 줘? 그럼 내 폰에 걔 전화번호만 찍어봐. 내가 진짜 딱 셋이 있었는지만 물어보고 끊을게"
"그게 지금 제정신이야? 내일 내가 김대리랑 카톡 해서 확인해 주면 되잖아!"
"X발 계속 싸고 도네?"
오빠는 외마디 괴성을 지르며 자기 핸드폰을 벽에 던졌다. 핸드폰 화면이 산산조각났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지금 폭력 쓰는 거야?"
"내가 너한테 손댔냐? 이게 폭력이야?"
"지금 이런 행동, 욕 나보고 참으라는 거지?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뭐? 어처구니 야 너 진짜 맞아야 되겠다. 네가 곱게 자라서 맞아 보질 않았지?"
"지금 뭐라고 했어? 뭐?"
"하...."
눈물이 터졌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억울함을 넘어 무서웠다. 오빠의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다고 한 뒤로 계속참고 기다려준 시간들과 내 시간이 너우 아까웠다.
"울어서 해결될 일이 아냐..."
오빠가 분이 안 풀린 얼굴로 말했다. 질렸다는 표정, 언젠가 자기가 싫어한다는 정치인이 뉴스에 나왔을 때 지었던 표정을 나에게 지었다. 너무 화가 나서 울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눈물이 뚝 그쳤다.
"소희야 오빠가 화도 내고 욕도 하고 미안하다. 우리 서로 잘못한 것 같은데 사실 네가 먼저 남자랑 단둘이 술마신건 사실이잖아. 싸대기 딱 두대만 맞자 그럼 내가 용서해 주고 사과할게."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인가 싶었다.
"싸대기 두대 세게 맞자. 너 잘못한 건 대가를 치러야지."
오빠가 손을 들었다.
"꺄아악"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려 들었다. 하지만 무서움 보다 어이없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폭력 쓴 거야? 때릴라고? 지금 뭐 하는 거야?"
"하.. 맞는 건 무섭냐? 그럼 꿇어... 무릎 꿇고 빌어봐"
"뭐? 뭐라고? 지금 나를 무슨 취급을 하는 거야?"
오빠가 다가오더니 나를 억지로 바닥에 꿇어 앉히려고 힘을 주면서 눌렀다. 어깨가 너무 아팠다. 어이가 없고 분노가 치밀었다. 너무 화가 나서 오빠의 손을 물었다. 오빠는 비명을 지르더니 손바닥으로 마구 때렸다. 지나가던 동네 주민이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이 출동했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처음 타보는 경찰차에 주눅이 들었다. 경찰서에서 여성 경찰관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하길 원하냐고 했다. 사실 그냥 이 상황이 없었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폭행으로 신고하고 접근금지 신청을 내리라고 했다. 더 이상은 나도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