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 낯선 도시를 낯설지 않게 걷는 오후
버지나아의 아파트 근처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도착한 첫날인 오늘은 분위기나 볼 겸 버스를 타는 연습도 할 겸해서 중심가로 가보기로 했다. 이곳이 아프리카의 모로코가 아닌 유럽의 스페인이기에 아파트나 버스의 시스템이 나에게 더 익숙하기는 하겠지만 처음 오는 도시에서 느끼는 이 편안함은 오랜만에 차지한 나만의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기도 하다.
중심가 근처에 교통량이 밀집해 있어서 버스 타고 내리기엔 좋다. 우리나라 마을버스처럼 주택가를 돌아 시내로 나가는 노선이라 정류장이 가깝고 편리하다. 게다가 다음 정류장 이름이 버스에 표시되니 묻지 않아도 정류장 이름만 알면 된다.
버스에서 내려 걷다가 맥도널드를 발견한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이곳이 반가운 이유는 무료 와이파이를 쓸 수 있어서다. 버지니아의 아파트는 모든 것이 완벽하지만 단 한 가지, 주인이 상주하고 있지 않은 관계로 인터넷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말라가에 대한 정보라고는 마리아와 버지니아가 수첩에 정리해준 것뿐이라 맥도널드에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시며 일단 정보검색부터 한다.
한참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 있다가 나가려고 하는데 한국어가 들린다. 정장을 입은 나이 든 남자와 여행자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간단히 인사나 하려고 말을 걸어보니 이분들, 사연이 있다. 정장을 입은 사람은 신분이 외교관이겠지만 공무원이라고 자기소개를 한다. 젊은 사람은 말라가에 오늘 도착한 여행자가 맞다. 영국에 거주하며 보험회사에서 근무한다는 이 사람은 자동차로 스페인 남부를 여행하려는 계획으로 오늘 말라가에 도착했다고 한다. 렌트한 차를 잠시 세워놓고 무엇을 사고 돌아왔는데 지갑과 노트북 등 차 안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도난당했다고 한다. 여행자 보험이라도 들었을 테니 그걸로 잘 해결하라고 말하자 공무원이라는 분이 혀를 끌끌 찬다.
"글쎄, 이분이 여행자보험을 안 들었답니다. 본인이 보험회사에 다니면서요."
더 이상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경찰에 신고하고 나서 한국대사관에도 연락이 되었고 마침 이 공무원이라는 분이 말라가에서 스페인어 연수중이어서 오늘이 공휴일인데도 한국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졸지에 빈털터리가 된 청년에게 오늘 첫 끼니라는 햄버거라도 사줄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타국에서 위기에 처한 국민에게 국가가 도움을 주는 장면이라 참 보기 좋다.
평일인데 왜 공휴일인지 물으니 오늘 날짜인 5월 1일은 스페인에서도 근로자의 날이라 쉰다고 한다. 아침에 들어가게 된 앞집 아주머니의 아들과 딸이 집에 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모처럼 쉬는 날 아침에 느닷없이 나타나 소란을 피운 셈이다. 알고 나니 오늘 나에게 친절히 대해준 스페인 사람들 모두에게 더욱 미안하고 고마워진다. 게다가 이 공무원이라는 분은 내 걱정도 해준다. 지금 묵는 위치를 묻고 버스를 타고 센트로에 왔다고 하니까 막차가 10시 정도면 끊기니까 그 전에 들어가라고 충고를 해준다. 우리나라처럼 버스가 밤늦게 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나도 정신이 바짝 든다. 다른 여행지와는 달리 관광명소 근처가 아닌 주택가에 머문다는 사실을 간과할 뻔했다. 긴급한 상황이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도 적어주는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맙다. 오늘 모든 걸 잃은 이 여행자는 그래도 여행은 계속할 거라고 한다. 남은 여행에 행운을 빌어주고 친절한 공무원님께도 인사를 하고 맥도널드를 빠져나온다. 오늘의 운세를 봤다면 "정오 이후 귀인을 계속 만나는 하루"라고 적혀있을 것만 같다.
여섯 시가 넘은 시각에서야 말라가의 구시가인 센트로(Centro) 지구로 들어선다. 각종 의류, 화장품 등의 현대적인 매장이 들어서 있는 아름다운 거리에 깜짝 놀라게 된다. 말라가는 상상하던 것보다 엄청나게 큰 도시다. 센트로 지구는 관광명소라더니, 바닥에는 대리석이 깔려있고 대성당, 로마시대 유적, 이슬람 유적들이 근처에 줄지어 있는 곳이다.
오늘은 잠깐 둘러보는 기분으로 시내로 나왔을 뿐인데 공휴일이라 사람도 많고 관광객도 많다. 아름다운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새로운 풍경이 나타나 마음을 빼앗는다. 단체 관광객인 듯한 노인들이 노천 카페에 앉아 왁자지껄 맥주를 마시는가 싶더니 놀랍게도 즉석 아카펠라 공연이 펼쳐진다.
행인들이 멈춰 서서 거리에 넘쳐흐르는 화음에 귀를 기울인다. 말라가라는 도시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오게 된 나에게는 이 하모니가 환영의 합창으로 들린다. 서있는 청중들의 박수에 다시 한 곡이 시작된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부르는 생기 가득한 합창이 골목에 메아리친다.
합창이 끝나고 발걸음을 돌려 피카소 미술관 앞을 찾아간다. 마리아가 내 수첩에 "말라가에서 가야 할 곳 - 레스토랑 편"에 적어놓은 토르메스(Trmes) 레스토랑을 찾아간다. 주문을 하고 나서 웨이터에게 몇 년 전에 이곳에서 일했던 마리아를 아느냐고 묻는다. 웨이터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하긴 마리아라는 이름은 너무 흔하다. 아이패드에 저장된 마리아의 사진을 보여주니 그제야 안다며 웃는다. 그녀가 지금 모로코에서 휴가 중이고 나와는 그곳에서 만난 친구라고 이야기하니 그는 너무 부러워한다.
혼자가 아니라 마치 마리아와 버지니아가 옆에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난다. 피카소 미술관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맥주를 들이킨다. 날이 저물면서 휴일의 밤을 즐길 사람들이 하나 둘 커다란 레스토랑과 거리의 노천카페에 모여든다. 아홉 시는 되어야 저녁식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이니 해지는 거리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뉘엿뉘엿 해지는 센트로를 산책한다. 유리를 통해 로마 유적이 보이도록 만들어 놓은 작은 피라미드 앞에서는 클래식 연주가 한창이다. 아름다운 선율은 행인들을 불러 모은다. 유적 앞에서 버스킹으로 이 멋진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이 도시가 좋아진다.
아름다운 구시가의 고즈넉한 건물 일층의 각종 매장에 불이 켜진다. 그렇지 않아도 대리석이라 반들거리는 바닥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환히 빛난다. 다른 날과 달리 돌아다니면서도 시계를 본다. 막차를 놓치지 않도록 너무 늦지 않게 귀가해야 한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지나가는 정류장을 찾아간다. 아름다운 곡선 끝에 매달려있는 신호등과 야자수가 잘 어울리는 말라가의 풍경은 이색적이다. 버스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 미리 가지 않았으면 막차를 놓칠 뻔했다. 거의 막차인 버스는 여행자의 것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가 버스에서 저문다. 오늘 첫날이라 내리는 정류장을 잘 보아야 하는데 가다 보니 거의 다 도착한 시점에서 길이 조금 달라진다. 아무래도 오가는 버스노선이 마지막에 달라지는 것 같아 대충 버스에서 내린다.
대강 방향만 잡고 걷다 보니 아파트 밀집 지역이라 복잡해서 길을 잃는다. 분명히 방향은 맞는데 아까 나올 때 눈에 익힌 버지니아의 아파트는 나오지 않는다. 그 사이 해가 져서 캄캄해진 거리는 한산하다.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많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남자에게 주소를 보여주고 길을 묻는다. 알지 못하는 주소지만 핸드폰으로 검색까지 해서 친절히 길을 알려준다. 이제는 길을 잃어야 여행하는 맛이 난다면 과장일까?
드디어 아파트에 도착한다. 아파트 건물과 중문과 집까지 세 번이나 열쇠를 사용하고 집에 들어간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집이라도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편하다. 모로코에서 만난 여행친구의 빈 아파트, 안에는 고마운 그녀의 흔적이 가득하다. 넉 달이 넘는 떠돌이 생활에서 이런 안정감은 처음이다. 오늘 만난 선한 사람들 덕분에 말라가가 더욱 좋아진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말라가와는 특별한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