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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Malaga), 아주 특별한 이야기 하나

[말라가] 유쾌하고 친절한 안달루시아 사람들

by Girliver

타리파에서 말라가(Malaga)로 가는 버스는 오전 8시에 있다. 때문에 긴장하며 기다린다.


타리파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아침,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특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스페인 남부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는 도로 주위가 온통 안개로 싸여있다. 짙은 안개가 도시를 삼킨 듯, 숲도 가라앉은 듯 묘한 풍경을 그린다. 수묵화 안으로 들어온 버스가 물방울에 흠뻑 젖어 도로 위를 달린다. 구름 같은 안개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안개 속에서 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스페인의 남부 연안에 부는 바람인 레반테(Levante)는 그 센 바람에 윈드서핑을 즐기게도 하지만, 습기가 많은 바람이어서 스페인 연안에 안개를 형성하기도 한다더니 그 현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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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안개에서 벗어난다. 이제는 먼 산에 걸친 안개의 파도를 그림 감상하듯 바라보면서 간다. 안개를 헤치며 스페인 남부 해안을 달려 작은 도시들을 들러 말라가에 도착할 즈음에는 하늘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활짝 개어있다.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인데 이런 안개를 처음 본 나만 흥분하고 있나 보다.


여행 중 만난 친구의 말만 믿고 모르는 주소를 들고 이국땅 어딘가로 찾아가는 일이 안개를 헤치고 가는 오늘의 여정 같아서 설레기도 하면서 걱정도 된다.


어느새 말라가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스페인 남부의 세계적인 휴양지 코스타델솔(Costa del Sol)의 관문인 말라가는 스페인에서도 손꼽히는 관광도시이자 대도시이다. 기차역과 마주한 버스터미널 주변의 경관이 그것을 대변한다. 터미널 앞에서 대기하던 택시에 올라 버지니아가 적어준 주소를 내민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기사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낭을 트렁크에 실어준다. 모로코처럼 택시기사와 흥정하며 피곤해질 필요 없는 익숙한 시스템에 마음이 편하다. 여느 때 같으면 관광지 근처에 가서 호스텔을 알아볼 테지만, 오늘 택시는 현지인들이 사는 주택가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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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과 반대방향의 아파트 단지를 지나쳐 언덕을 올라 주택가로 접어들던 택시가 멈춘 곳은 버지니아의 할아버지 댁이다. 미리 연락해 놓는다고 했으니 들어가서 버지니아의 아버지를 기다리면 된다. 친절한 택시기사가 주소 확인까지 해준다. 차비를 계산하고 택시에서 내려 초인종을 누른다. 배낭을 멘 동양 여자가 어디에 가는지 궁금했는지 택시기사는 출발하지 않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다.


고요하기만 한 정오의 주택에는 초인종 소리만 울릴 뿐 아무런 기척이 없다. 아직까지 떠나지 않고 나를 주시하던 택시기사가 내리더니 함께 초인종을 눌러준다. 역시 반응이 없다. 난감해하며 버지니아가 수첩에 적어준 전화번호를 보여주자 기사는 흔쾌히 핸드폰으로 버지니아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상대방 전화가 자꾸 끊긴다. 어떻게 된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모로코의 세프샤우엔에서 헤어지고는 페이스북의 메시지 창으로만 연락을 하고 있는데 그나마 나는 휴대폰 없이 여행 중이라 와이파이가 될 때만 아이패드를 쓸 수 있으니 당장 연락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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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상황을 눈치챈 기사가 아예 택시에서 내려서 이웃집 문을 두드린다. 작은 소란에 앞집 창문이 열리더니 아주머니와 젊은 남자가 고개를 내민다. 택시기사가 스페인어로 대략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버지니아의 조부모님이 이곳에 오래 사셨다고 한 것 같아서 어쩌면 이 앞집 사람들이 버지니아를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스페인 발음으로 "베르히니아(Verginia)"라는 이름을 말하고 그동안 남미와 스페인을 여행하며 주워들은 스페인어를 최대한 말해본다. 다행히도 그들은 버지니아를 알고 있다. 들어와서 기다리라며 젊은 아들이 뛰어내려와 내 배낭을 들고 성큼성큼 집으로 들어간다. 그제야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차에 오르는 택시기사에게 몇 번이고 "그라시아스(고맙습니다)!"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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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마당에 배낭을 놓고 앉는다. 버지니아의 조부모님이 왜 집에 안 계시는지 그녀의 아버지가 왜 전화를 받지 않는지 모르겠다. 도착시간을 정확히 몰라서 대략 점심쯤이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안달루시아의 남의 집 마당에 앉아 낯선 말라가의 경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 상황이 기가 막히다. 이렇게 기다릴 장소라도 생겼다는 것을 위안삼아 앉아있는데 집안에서 아주머니가 나오신다. 사람을 마당에서 기다리게 하는 게 걸리셨는지 괜찮으면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신다. 넉 달이 넘어가는 여행하는 동안 변죽만 늘어나서 웬만한 체면치레는 생략한 지 오래다. 최대한 미소를 띠며 얼른 집으로 들어간다.


내가 들어간 쪽은 주방으로 연결이 된 문이다. 아주머니는 식탁에 앉으라고 하시더니 커피를 마시겠느냐고 물으신다. 물론 대화는 모두 짧은 스페인어와 눈치로 이루어진다.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따뜻한 카페 콘 레체 한 잔을 쥐고 앉으니 긴장이 풀리고 다시 여행 모드로 돌아가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진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말라가 시내로 나가 호스텔을 잡으면 그만이다. 빠꼬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집 아들에게 일단 버지니아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통화가 되어 이곳으로 오시기로 하고서야 마음이 놓인다.


이제 버지니아의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평화로운 아침 느닷없는 동양 여자의 출현이 신기한지 빠꼬가 나를 바라보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 커피를 다 마셔갈 즈음 더 이상 할 말을 못 찾고 웃고만 있는데 아주머니의 딸이 주방으로 들어온다. 아들과 딸 모두 20대 중반은 넘어 보이는데 평일 낮에 장성한 자녀들이 왜 집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주머니는 늦잠 잔 딸이 아침을 먹지 않았다면서 딸과 나에게 하몽을 끼워놓은 보카디요를 주신다. 주는 소스를 마다하지 않고 하몽에 뿌려 보카디요를 맛있게 먹고 있자니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쳐다보신다. 눈길이 따뜻한 엄마 마인드다.


배를 채우면서 이집 식구들과 이야기할 궁리를 한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물어서 인터넷을 켠 후 구글 번역기에 접속해서 한국어를 스페인어로 음성 번역하게 한다. 그들의 말은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해도 재미있어한다. 여기 오게 된 사연과 마드리드나 세비야 여행 이야기를 하니 흥미 있게 들어준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었던 이야기에 아주머니가 박수를 친다. 함께 사진도 찍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드디어 버지니아의 아버지 후안이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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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가 장담한 대로 후안은 호인이다. 버지니아의 아파트는 이곳에서 멀지는 않지만 차로 이동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배낭이 복병이다. 후안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나를 태워 갈 수 없다. 결국 빠꼬가 자신의 승용차를 가져와 배낭을 싣고 나를 태우고 가고 후안은 뒤따라오기로 한다. 말도 안 통하는 이방인을 흔쾌히 집에 들여서 커피와 식사까지 대접해주신 아주머니와 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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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의 아파트는 아까 버스터미널에서 택시 타고 올 때 보았던 수많은 아파트 단지 중의 하나다. 여기까지 데려다준 빠꼬와도 인사를 나누고 후안을 따라 아파트로 들어간다. 버지니아가 지금 독일에서 일하기 때문에 비어있는 아파트를 손님이 간다고 일부러 정리한 흔적이 역력하다. 아버지 후안은 빈 냉장고에 물이며, 우유, 주스, 탄산음료, 맥주까지 채워 놓으시고 초리소와 하몽도 사다 넣어 두셨다. 식탁엔 빵과 과자도 혼자서 다 먹기도 힘들 만큼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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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아버지는 구석구석을 데리고 다니시며 집 구조와 전자제품 사용법, 열쇠 꾸러미에 있는 각각의 열쇠의 용도뿐 아니라 말라가 시내로 나가는 버스번호까지 세세한 것을 다 알려주신다. 물론 모두 스페인어와 바디랭귀지지만 한 마디도 빠짐없이 다 이해하게 된다. 후안은 그렇게 주의사항을 꼼꼼히 알려주고 오늘은 일이 있다며 토요일 오전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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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라는 낯선 땅에서 마리아와 버지니아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자신들은 아직도 모로코 여행 중이면서, 스페인으로 간다는 나의 이야기에, 비어있는 아파트 빌려 줄 테니 꼭 말라가에 가라고 권하던 해맑은 얼굴들. 거기에 그 뒤처리를 다 감당해주시는 아버지 후안, 느닷없는 외국인의 출현에도 유쾌하고 친절하던 앞집 사람들, 돌아가지 않고 나를 도와주던 택시기사까지... 모로코 셰프샤우엔에서 버지니아, 마리아와의 첫 만남부터 오늘 말라가까지 이어지는 스페인 사람들의 친절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말라가에서 해야 할 일까지 설명하며 내 수첩에 일일이 적어주던 꼼꼼한 친절에 거의 반강제(?)로 오게 된 말라가에서 오늘처럼 친절한 사람들을 만난 것 또한 우연만은 아니다. 유쾌하고 친절한 안달루시아 사람들의 기운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져 혼자 있어도 저절로 웃게 된다. 내 여행에서 말라가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로 기억될 것이다.


후안이 준비해 놓은 과자에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열쇠 꾸러미를 들고 아파트를 나선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열쇠를 주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 친절함, 순수함을 선뜻 받은 나에게는, 과연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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