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의 마지막 하루
밤새 쏟아지는 빗소리에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오전에 비가 멈춘다. 오월 중순의 스산함은 괜히 마음까지 움츠러들게 한다. 가벼운 오리털 패딩에 바람막이를 껴입고 길을 나선다. 도나우 강 건너편을 장식하는 부다페스트 왕궁으로 간다. 어제 밤낮으로 서체니 다리를 건넜기에 오늘은 메트로를 타고 부다(Buda) 지구로 간다.
메트로에서 내려 버스를 타려고 언덕을 오르자니 트램이 지나가는 정류장이 내려다보인다. 두 량짜리 옛 트램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긴다. 왕궁으로 오르려면 버스를 타야 한다. 케이블카를 타도되지만 호기심에 버스를 타보는 것이다. 어제 구입한 교통티켓 10회권은 메트로와 트램, 버스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언덕을 올라가 정류장을 찾고 행인들에게 방향을 물어 버스에 오른다.
"성채의 언덕"이라는 뜻의 바르 언덕으로 오르던 버스는 공사 중인 구간에서 승객들을 하차시키고 되돌아간다. 사람들을 따라 버스가 다니지 않는 공사구간을 걸어가다 보니 다른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다시 버스에 올라 왕궁에서 하차한다. 이제는 초행길이어도 어떻게든 실패하지 않고 잘 찾아간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물어서 해결하고 분위기를 알아채는 눈치도 백 단쯤 된 것 같다.
왕궁은 아름다운 자태를 풍기며 서 있다. 스산한 날씨지만 부다페스트 최대의 관광지답게 아름답기만 하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호스텔에서 늦게 나와서 왕궁으로 올라온 시각이 대략 열두 시가 채 안되었다.
왕궁을 방문하겠다고 별생각 없이 올라왔는데 대통령 집무실이 먼저 보인다. 지붕의 삼각형 하얀 면에 "MDCCCVI"라는 글자는 1806년이라는 의미다. 근엄하게 서있는 근위병을 바라보며 왕궁으로 발길을 돌리려 하는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이제 막 근위병 교대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일부러 시간 맞춰 온 것이 아니라서 뜻밖의 근위병 교대식이 더 흥미롭다.
작은북을 들고 박자를 맞추는 병사와 열을 맞춘 절도 있는 행진을 하는 병사들은 한참 동안 볼거리를 선사한다. "인생만사 새옹지마"임을 여행길에서 그렇게 많이 경험하고도, 그새를 못 참고 비를 원망하던 아침의 푸념이 눈 녹듯 사그라진다. 왕궁에 들어가는 문에는 마자르 인들의 상징인 전설의 새 "투룰" 조각상이 보인다. 단체관광객들이 설명을 듣는 뒤쪽에서는 한쪽 발에 칼을 쥔 투룰이 왕궁을 내려다보고 있다.
왕궁 앞의 동상이 도나우 강과 페스트 지구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 13세기 중반 건설되어 13세기 후반 몽골 침입 때 파괴되었다가 15세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된 성은 16세기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또 파괴되었고 17세기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으로 복원했지만 1,2차 세계대전 때 다시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왕궁은 1950년대에 복구했다고 하니 헝가리의 고난의 역사는 참담할 지경이다. 지금은 헝가리 국립 갤러리,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 세체니 도서관 등으로 이용된다.
왕궁에서는 도나우강과 서체니 다리, 페스트 지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의회 건물로 꼽히는 국회의사당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도나우 강변의 풍경은 밤이나 낮이나 멋지다. 어제는 야경에 반했지만 흐린 날 대낮의 채도 낮은 수채화 같은 풍경도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게 된다.
왕궁이 언덕이라 도나우 강과 페스트 지구 반대편의 풍경과 왕궁 너머 진짜 부다 지구의 풍경도 바라보게 된다. 페스트 지구의 상업적인 풍경과는 달리 부다 지구의 왕궁 뒤편은 소박한 건물들이 빼곡히 서 있다.
왕궁에서 나가 마차시 성당(Mátyás templom)으로 간다. 역대 국왕의 결혼식과 대관식 장소였다는 이 성당은 15세기 후반 헝가리의 세종대왕이라는 마차시 1세가 대대적으로 개축하며 첨탑을 세우며 개축하였다고 한다. 이 성당 역시 르네상스, 고딕,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화려한 성당이지만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모스크가 되기도 하고 19세기 복원을 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으로 피해를 입고 또다시 복구한 아픈 역사를 지닌 성당이다. 성당의 화려한 양식에 지붕의 알록달록한 색채의 모자이크가 정점을 찍는다. 섬세한 장식의 성모 마리아 문도 아름답다.
마차시 성당을 지나 도나우 강변 쪽으로 내려간다. 유럽의 명소가 다 그렇지만 동화 속의 성처럼 보이는 고깔 모양의 탑 일곱 개가 들어온다. 이곳은 "어부의 요새(Halászbástya)"다. 일곱 개의 탑은 헝가리를 건국한 일곱 개의 마자르 족을 상징한다. 어부의 요새는 1902년 완공된 헝가리 건국 1000주년을 기념하는 건축물이다. 어부의 요새라는 명칭은 18세기 어부 조합이 적의 침입을 방어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독특한 회랑도 이채롭다.
부다페스트 기차역인 뉴가티역으로 간다. 뉴가티역의 철골은 19세기 에펠사에서 설계했다고 하더니 과연 나 같은 문외한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국제버스로 부다페스트에 도착해서 공항으로 나갈 예정이라 기차역에 들를 일은 없어서 괜히 역사 안을 기웃거리게 된다.
비 그치는 것을 기다리다 숙소에서 늦게 나왔고 부다 지구에서 오랫동안 있다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있다. 뉴가티역은 부다페스트 최고의 쇼핑센터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런 쇼핑센터야 한국 가면 지겹게 보게 될 것이지만 이 쇼핑센터의 1층, 세계에서 가장 우아하다는 맥도널드로 들어간다. 맥도널드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같은 입맛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지만, 이 맥도널드 건물은 20세기 초의 레스토랑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유명하다. 귀족 저택 같은 고풍스러운 장소에서 햄버거 세트를 주문해 먹으며 와이파이를 쓴다.
날씨도 좋지 않고 시간이 많지 않은 여파로 많은 곳에 들를 수는 없다. 우중충한 바깥과는 달리 밝은 조명의 맥도널드에서 가이드북을 뒤지다 부다페스트의 샹젤리제라는 안드라시 거리로 간다. 1800년대 후반 건설되었다는 안드라시 거리는 부다페스트 최대의 번화가 이기기도 하다. 이곳을 지나는 메트로 역시 1896년에 건설된 것으로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영국, 터키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 유럽 대륙에서는 첫 지하철이라고 한다. 노란 미니 전철이 낮은 천장의 역사에 꼭 기어 들어온다. 플랫폼에는 나무 벤치가 있고 티켓을 집어넣는 빨간 검표기가 있고 메트로 입구 역시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안드라시 대로의 테러 하우스(Terrer Haza)를 찾아간다. 주거용 아파트로 지어져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이 건물 지하에 감옥을 설치했고 공산정권하에서도 헝가리 비밀경찰의 본부로 사용되었다는 악명 높은 건물은 지금 부끄러운 그들의 만행을 기록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어있다. 테러 하우스는 2차 세계대전과 공산 체제 아래 희생자를 애도하고 그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인 것이다.
입구에는 헝가리 나치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와 공산당의 상징인 아래 촛불과 조화가 놓여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흑백사진은 3층까지 뚫려있는 중정을 꽉 채운다. 경건해진 마음으로 전시물을 둘러본다. 반체제 인사들을 가두거나 고문한 현장을 재현해 놓기도 하고 나치의 참상을 증언하는 비디오가 계속 상영된다. 나치의 학살, 소비에트 공화국의 침략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어떻게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얼마나 억울하게 죽어갔는지를 바로 보게 하는 전시물들이다.
암울한 시대의 처참한 역사를 기록해 놓은 테러 하우스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다. 나와 함께 들어온 어린 학생의 단체 관람도 있고 머리 희끗한 유럽인들도 많이 보인다. 인류의 대재앙이라고 불릴 만큼 끔찍했던 전쟁과 학살을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역사는 기록되어야 하고 보존되어야 한다.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은 후대에게 교훈과 함께 더 나은 길을 가도록 안내하는 지침이 될 것이다. 먹먹한 마음으로 테러 하우스를 나오니 비를 머금은 하늘은 더욱 어두워지는 중이다.
안드라시 거리의 끝에는 영웅 광장이 있다. 이 역시 어부의 요새처럼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헝가리인의 조상인 아시아계 유목민족인 마자르족 수장들의 동상과 함께 헝가리 역대 왕과 혁명가의 동상 등 헝가리 영웅들의 동산들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영웅 광장이다. 흐린 날씨 덕분인지 오후가 되어 그런지 광장이 휑하다.
영웅광장은 시민공원과 정문이 연결되어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시민공원으로 들어가 본다. 편안한 녹지를 걷다 보니 농업박물관으로 사용된다는 바이다후녀드 성이나 공예미술관을 만나게 된다. 가이드북을 뒤적여야 이곳이 그곳인지 알 수 있기는 하지만 녹음 가득한 시민공원에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천의 도시 부다페스트에서 규모가 가장 큰 온천은 세체니 온천이다. 시민공원에 위치하고 있어 걷다가 만나게 된다. 네오바로크 양식이라는 건물 외관이 고풍스러워 성처럼 보이지만 그 앞 우물처럼 보이는 곳에서 뿜어대는 하얀 수증기가 이곳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하루 더 있었으면 이곳에서 여독이나 풀고 갈 텐데 아쉽게 스쳐 지나간다.
영웅광장에서 서체니 다리 근처까지는 일직선의 대로다. 여행의 마지막 저녁은 이 거리를 천천히 걷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일과를 끝낸 사람들이 트램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푸근해진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지막 저녁 풍경이기 때문일까?
헝가리의 명물이라는 펄러친터(Palacsinta) 전문점에 들른다. 펄러친터는 헝가리식 디저트인 일종의 크레페다. 초코시럽과 바나나를 넣은 펄러친터는 느끼할 정도로 달콤한데다 펄러친터 두 개에 음료까지 마시니 뱃속이 그득하다. 알콩달콩 이야기 나누는 현지인들 속에서 혼자 자리를 차지하고 먹어도 그 달콤함이 기분을 달래준다.
온종일 찌푸렸던 하늘에서 드디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를 맞으며 호스텔로 돌아가 짐을 꾸린다.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특별한 것도, 그렇다고 똑같은 것도 없다. 비슷하지만 다른 풍경 속에서, 환경이 일구어 온대로 역사가 이끌어 온 만큼 그렇게 걷다가 넘어지고 일어나 다시 걸어온 사람들이 살아간다. 엄청난 환희를 안겨준 순간, 소소한 감사를 되뇌던 시간,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짜증을 유발하던 상황들도 여행의 일부였고 길게 보면 삶의 과정일 뿐이었다.
긴 여행의 마지막 날이지만, 끝이라는 것을 빼면 여느 하루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