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넘어

까미노데산티아고+18

by Girliver

3월 18일의 발걸음 : 레온(Leon)에서 비야르데마사리페(Villar De Mazarife)까지 24km



침낭을 정리하는데 옆 침대의 하루까가 자신의 까미노 첫날인 오늘 나와 함께 출발하고 싶다고 한다.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기부제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고 상냥한 스물두 살짜리 일본 처녀와 함께 길을 나선다. 항상 유쾌한 표정으로 순례자들을 즐겁게 하던 오스피탈레로가 문 앞에 나와 일찍 출발하는 우리를 배웅해준다. 하루까가 아이폰을 꺼내들더니 자신의 까미노 첫 날을 기념하기 위해 오스피탈레로와 나, 케이와 함께 셀카를 찍는다.


어제 오가면서 몇 번을 지나친 레온 대성당을 지나 까미노로 접어든다. 먼저 걷는 순례자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을 보니 레온에서 까미노를 시작하는 순례자가 많기는 하다. 레온에서 산티아고는 300km 거리다. 이미 500km를 걸어온 나와 300km여정의 첫발걸음을 떼고 있는 하루까의 기분은 같을 수가 없다. 하루까의 상기된 표정이 그걸 말해준다.


유서 깊은 레온의 시내를 관통한다. 하루까의 말에 의하면 까미노를 주제로 한 "The way"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나왔던 곳이라고 한다. 까미노에 관한 다큐라면 산티아고 길의 어디라도 화면에 담길 것이다. 포르투갈에서 공부하고 있는 하루까는 여기 오려고 여러 가지 정보를 모은 모양이다. 까미노도 끝나고 여행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나도 "The way"를 찾아 봐야겠다.


도심을 벗어나는 길은 여전히 별로다. 유서 깊은 레온이라해도 대도시 외곽은 주택과 공장이 늘어서 있을 뿐이다. 빨리 벗어나고 싶은 길이지만 발이 편하지 않아 속도를 내지 못하고 하루까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걷게 된다. 두 발에 붕대를 감아 발목까지 칭칭 감아 올리고 크록스를 꺼내 신고 간다. 붕대를 감으니 발이 트레킹화에 들어가지 않아서 생각한 고육지책이다. 물집은 물론이지만 오른쪽 발목이 아파서 케이의 스틱을 빌려 의지하고 걸으니 걸음이 더 느려진다. 오늘 첫날인 하루까는 걸음이 원래 느린 건지 발 아픈 나와 걷는 속도가 비슷하다. 게다가 이야기까지 하며 걸으니 더 느릴 수밖에 없다. 긴장감으로 발그레해진 볼을 감싸며 하루까는 계속 수다를 떤다. 여느 일본인과는 다르게 무척 외향적인 아가씨다.


한참을 걸으니 현대적인 건물이 나온다. 까미노를 걸으며 중세 성당의 경건한 모습에 익숙해져 있다가 현대적인 성당을 만나니 신기하다. 혹시 화장실을 갈 수 있을까 둘러보지만 실패하고 어딘가에 있을 바(bar)를 기약한다. 오늘은 까미노가 안내하는 길이 두 갈래다. 하나는 자동차 도로를 끼고 걷는 길이라 거리가 짧고 편하지만 소음이 많은 길이고, 다른 하나는 조금 돌아가지만 도로와 떨어져 있어 메세타의 경치를 보고 가는 길이다.

빌딩보다는 산이 좋고 사람의 흔적보다는 자연의 자취가 좋다. 케이와 나는 당연히 비야르데마사리페(Villar De Mazarife)쪽 메세타의 평원으로 둘러가는 길을 선택하고, 오늘이 첫날인 하루까는 도로를 낀 편한 길을 택한다. 이야기하며 두 시간여를 걸었는데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그녀와 헤어진다. 첫 걸음을 함께 걸어주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 상냥한 하루까의 예쁜 웃음이 그리울 것 같다. 서로에게 "부엔 까미노!"를 빌어주고 가벼운 포옹도 해주고 헤어진다.


드디어 바(Bar)를 만난다. 까페콘레체 한 잔을 마시는 핑계로 바(Bar)에서 화장실에 다녀온다. 벌써 순례자들이 한 차례 지나갔는지 주인이 수많은 커피잔을 치우지도 못한 채 커피를 내리고 있다. 야외 테이블에서 디아(Dia)의 할인 코너에서 사두었던 커다란 초콜릿까지 꺼내 한 입 물고 출발한다. 배부른 한 끼 식사보다 초콜릿이 훨씬 나을 때가 있다.


아까 하루까가 간 길이 전통적인 까미노 길이지만 그곳은 교통량이 많아 자동차의 소음을 견디며 걸어야 한다고 해서 대체 까미노를 선택했다. 발이 고생하고 아파도 이 길이 좋은 걸 어쩌랴. 아스팔트를 걸으면 아픈 발은 조금이라도 편하겠지만 신체의 다른 기관들이 모두 고생해야 하기에 다리만 아픈 게 차라리 낫다. 붕대로 감아놓고 넉넉한 크록스를 신었더니 발바닥이 폭신해져서 물집은 괜찮다. 이제 문제는 발목이다. 오른쪽 발목이 많이 부어서 걷는 게 힘들어졌다. 길은 험하고 발목도 걱정되지만 어쨌든 마음 편하게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까미노 표지 위에 신발이 얹혀 있다. 저 신발의 주인은 얼마나 걸었을까, 저걸 벗어두고 나처럼 크록스라도 바꿔 신고 갔을까? 어제 너무나 걷고 싶었기에, 오늘 이 풍경들을 보며 걷는 것이 새롭고 감사하다. 아픈 발을 빼고는, 육체와 정신이 모두 걷기에 익숙해졌다. 태양과 함께 하루를 걷는다. 살면서 이렇게 매일 야외에 있어본 기억이 없다. 더불어 해의 존재를 날마다 강렬히 느끼는 것도 처음이다.


레온부터 걷기 시작하는 순례자들도 많다더니, 까미노에 낯선 순례자들이 출현한다. 오늘이 걷기 첫날이라는 캐나다인 남자가 지나가면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붕대를 감고 등산화는커녕 운동화도 아닌 크록스를 질질 끌고 가는 나를 보고 하는 말이다. 18일째 걷는 중이고 발이 아파서 그렇다고 하니까 깜짝 놀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까미노 첫 날의 생경함이 떠오른다. 까미노에서 펼쳐질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눈 내리는 길을 걸으며 젖은 운동화를 걱정하던 그날이 옛 이야기처럼 아득하다. 시간은 나를 여기로 데려다 놓았다. 벌써 걷기 시작한 지 18일이 되었다니, 감회가 새롭다.

케이가 빌려준 스틱에 의지해서 걸으니 무게가 분산되어 발걸음이 가볍다. 발목은 아프지만 스틱을 짚고 걷는데다가 물집이 낫고 있는 중이라 그럭저럭 편하다. 부은 발을 트레킹화에 억지로 넣지 않고 크록스를 신고 편하게 걸은 것도 자극을 줄여 통증을 완화해준다. 생각해 보면, 늘 걱정이 또 다른 걱정을 낳았다. 발이 아프기 때문에 걷기도 전에 더 아플까 봐 미리 겁먹고 걱정하게 된다. 얕은 경험의 깊이로는 알 수 없던 것들을 길 위에서 맞닥뜨리게 되면 당황스럽다. 하지만 막연한 걱정보다는 해법을 찾고 대처하는 것이 신속한 문제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겨울 동안 문을 닫았던 까미노의 알베르게들이 하나 둘 개장 준비를 하는 3월 중순이다. 이 알베르게도 개장 준비로 어수선한 가운데 문을 열고 있다. 이곳은 페페라는 의사가 암 선고를 받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었다가 병이 완치되는 기적을 맛본 후 봉사하는 마음으로 세운 알베르게라고 한다.


다리가 아파도 이렇게 금방 도착하다니 까미노에 많이 적응이 됐다. 어제 하루 아픈 다리를 쉰 탓도 있을 것이다. 24km는 이제 걸을 만한 거리다. 다른 순례자들은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 짐을 풀고 씻고 빨래하고도 기나긴 오후가 고스란히 남는다. 알베르게 마당에서 햇볕을 쬐는 고양이와 놀아주기도 하고 마음 편히 독서도 하다가 마을 구경을 나간다. 작은 마을이라 구멍가게인 띠엔다(Tienda)만 두 개 있다.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저녁을 먹기로 하고 점심 요깃거리로 빵과 주스, 과일을 산다. 물건을 구입하는 것보다는 마을 구경, 띠엔다 돌아보는 것이 목적이기는 하다.

해가 기울어지자 알베르게에는 여섯 명의 순례자가 더 들어온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저녁은 오스피탈레로가 만들어준다. 4인용 식탁에 두 팀으로 앉아 식사를 하게 되어 우리 테이블에는 나와 케이, 독일 여자 카린과 아까 길에서 만난 캐나다인 피에르가 함께 앉았다. 모두들 오늘 레온부터 처음 걸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해서 오늘이 18일째인 우리는 완전히 경탄의 대상이다. 내 발에 감아놓은 붕대를 보고 다리가 아픈 걸 알게 된 카린은 그 발로 500km를 걸어온 나를 존경한다고 해서 좌중을 웃긴다. 까만 머리 한국인들이 먼 이국에서 찾아와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게 신기하게 보이는 것이다. 카린과 피에르는 2주 정도의 휴가를 내서 까미노에 왔다고 한다. 5개월간의 여행 중인데 지금은 까미노를 걷고 있다니까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장기간의 여행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누구든 시간 내는 것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현실에서 탈피한다는 일탈의 재미라기보다는 일상과는 다른 또 다른 하루가 있음을 알아가는 즐거움이다. 비슷비슷한 일상에서 얻는 얕은 경험으로는 알 수 없었던 일들을 길 위에서 맞닥뜨리는 긴장과 감동이 있다. 한국에서의 나는 너무 "곱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경험의 깊이가 더해지면서 생각의 한계를 조금씩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일찍 알베르게에 들어온 특권으로 방 하나를 케이와 둘이 차지했다. 오늘 밤은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편히 방을 사용한다. 밤늦도록 불을 켜 놓고 뒹굴대면서 아이패드에 저장된 법륜스님의 팟캐스트를 케이에게 들려주고 그에 관한 이야기도 나눈다. 오늘은 오래 걷지 않아 발의 부담이 적었고 그나마 발의 물집은 나아가는 중이어서 마음이 편안하다. 오른쪽 발목이 부어오르기는 하지만 날마다 걸어야 하니 발이 빨리 낫지는 못하리라는 것도 예상한다. 그럼에도, 걷기에 있어서 최악의 위기는 어제 레온을 기점으로 이미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다. 몸도 마음도 한계를 넘어서는 중이다.


비야르데마사리페의 알베르게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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