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타나 빙그레 웃고 있는 까만 콧수염, 모한
어제 봐 둔 쇼핑몰로 간다. 백화점 크기의 커다란 건물 전체가 모두 사리나 펀자비 드레스 등 여성용 옷감이나 기성복을 파는 거대한 쇼핑몰이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시원한 매장을 돌아다니며 옷을 고르고 입어보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간다. 동행은 펀자비 드레스를 한 벌 사고 나도 민소매 상의를 하나 사서 나온다.
시간이 벌써 오후 3시인데 점심도 못 먹어서 쇼핑몰 바로 앞 건물의 "Indian Family Restaurant"으로 들어간다.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니까 비싼 곳인가 싶지만 4시까진 모한 아저씨를 만나러 호텔로 돌아가야 하고 배도 고프니 그냥 들어가 보기로 한다. 식당은 다행히도 우리식 패밀리 레스토랑은 아니다. 말 그대로 '가족식당'같은 분위기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려 하던 우리는 "꺄악~" 소리를 지르고 만다. 앉으려던 바로 옆 테이블에서 모한 아저씨가 직원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귀여운 콧수염을 씰룩 거리며 너희들 여기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 모한을 보니 반가워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싶은 게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다.
오지랖 넓으신 아빠 마인드 모한 아저씨는, 반가우면서도 놀라운 우연에 입을 벌리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빙그레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뭐 먹을 거냐고 묻는다. 메뉴도 모르는 외국인인 우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웨이터를 불러 메뉴판을 보고는 의견도 묻지 않고 단호히 메뉴를 정해주고 지기 테이블로 돌아간다. 잠시 후 식사가 나온 후 또다시 우리 테이블로 와서는 먹는 순서와 방법, 맛을 미리 알려준다.
덕분에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는다. 한국에선 먹는 양이 무척 적은 사람이었는데, 이제 남인도에선 저 많은 양을 다 먹어 치운다. 내가 생각해도 기가 찰 지경이다. 내 모습인데 나 같지 않으니 말이다. 여행지에선 한국에서와는 많이 달라진다. 동화 속 요정처럼 필요한 순간에 눈앞에 나타나는 모한 아저씨와의 인연도 너무 재미있다. 비록 요정이 좀 독단적(?)인 것 같아도 그것이 친절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니까 더 유쾌하다. 일상과는 다른 나를 만나게 되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는 여행의 날들이 행복감을 준다.
오늘 밤 떠나는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없음을 아는 모한이 우리를 해변 선착장으로 데려간다. 코친의 4구역 중 포트코친(Port Cochin)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다. 날짜를 정하지 않고 정처 없이 다니면 좋겠는데 이미 항공편을 예약해 놓은 일정이라 시간이 별로 없다. 포트코친에서 며칠 머무르면서 향신료 항구의 옛 풍경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텐데 이쉽게도 오늘 밤 떠나야 한다.
현대적인 에르나꿀람에서 포트코친으로 가는 조금 다른 바다 위에서 해가 진다. 서쪽 바다라 석양이 더욱 아름답다. 호텔과 요트가 있는 현대적인 모습도 보인다. 이 모든 풍경이 어우러진다. 인도의 동부 벵골만을 지나, 최남단 깐야꾸마리에서 인도양을 바라보고, 이제 아라비아해 위에 떠 있다. 인도 대륙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있는 일정이다. 모한 아저씨와 동행의 눈길도 석양에 머문다. 어느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한 배를 타고 있는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당도한 포트코친은 예스럽다.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거리가 더욱 고풍스럽다. 어느 건물벽을 가득 채운 그림이 눈에 쏙 들어온다. 여기는 남인도 포트코친이지만,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인지 중국의 쑤저우인지 모를 풍경이 펼쳐진다. 물길로 이동을 하는 배가 베네치아의 곤돌라 못지않게 멋져 보인다. 고즈넉한 포트코친에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는 게 못내 아쉽다. 다음에 인도에 오게 되면 꼭 여기서 머무르고 싶다는 소망 하나를 남기고 초입에서 돌아선다.
에르나꿀람으로 돌아오는 길목의 밤바다는 그 마음을 아는지 더욱 아름답다. 배에서 내릴 때쯤에는 이미 어두워진 뒤다. 모한, 동행과 함께 수다를 떨며 밤거리에 나선다. 지금 보니 이곳이 모한이 첫날 산책시켜 주었던 바로 그 거리다. 내년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갈 예정이니 그때 꼭 서울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잊지 않는다. 정신없이 다니다가 환전도 못했다고 하니까 바로 릭샤를 잡아서 인근 은행 ATM에 데려다준다. 그 릭샤를 다시 타고 사설 버스 사무실로 향한다.
우리는 오늘 밤 버스로 벵갈루루(Bangalror)를 향해 떠나고 모한은 내일 아침 첸나이(Chennai)로 가야 한다. 모한 아저씨가 탈 버스표는 구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벵갈루루 행 볼보 버스 티켓을 손에 쥔다. 이제 맡겨놓은 배낭을 가지러 호텔로 가야 한다. 모한은 늘 그랬던 것처럼 지나가던 릭샤를 불러 세운다. 여태 함께 다녔으니 호텔에도 같이 가는 건가 싶었지만, 우리가 릭샤에 올라앉아도 그는 미동도 안 하고 그대로 서 있다. 콧수염을 찡긋 거리고 가지런한 하얀 이를 드러내며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이젠 너희 둘이 가라. 잘할 수 있지? 여행 잘하고 내년에 한국에서 봐."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느닷없는 이별에 코끝이 찡한데, 모한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악수를 청한다. 마치 내년이 내일이라도 되는 듯, 한국이라는 공간이 코친 바로 옆 도시라도 되는 듯.
짐을 찾고 버스 사무실로 돌아온다. 벵갈루루행 티켓을 손에 쥐고 버스를 기다리며 이제야 모한 아저씨와 작별한 게 실감 나기 시작한다. 거의 한 달 간 인도를 돌아다니면서 코친에서처럼 마음이 편안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여행은 설렘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긴장감은 기본 옵션으로 장착하고 가는 것이다. 혼자라는 부담감이 늘 있었고, 동행이 생긴 후에도 여행자이기에 느끼는 낯선 것들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은 항상 깔려 있었다. 여기 코친에서 모한 아저씨를 만나면서 그런 부담감들이 어느새 사라졌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다. 코친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어디선가 모한 아저씨가 짠하고 나타나서 미소를 지으면서도 단호하게 문제를 해결해 줄 것만 같다. 처음 기차에서 만났을 때 낯설던 그를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케랄라주, 코친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늘 찬드라 모한이라는 이름이 떠오를 것이다.
탑승시간이 늦어진 벵갈루루행 버스가 여유를 부리며 도착한다. 밤 버스 침대에 몸을 구겨 넣는다. 함피(Hampi)로 가기 위해 내일 하루 벵갈루루를 경유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