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친에서의 백워터 트립(Backwater trip)
수로유람(Backwater trip)을 하러 간다. 반일(half day)에 650루피, 싼 가격은 아니지만 인도 케랄라 주에서 수로유람은 꼭 해봐야 할 코스다. 호텔에서 예약했으니 수수료는 조금 더 들었겠지만 서비스는 좋다. 호텔로 우릴 태울 택시가 온다. 택시는 같이 수로 유람을 할 사람들을 다른 호텔에서 픽업해서 함께 간다. 늘 타던 릭샤가 아니라 택시에 오르니 어색하면서도 왠지 좋다.
시내에서 빠져나와 한 시간 정도 달려서 수로 유람 출발지에 도착한다. 손님이 더 있나 싶었는데 택시에 함께 탄 인도인 커플과 우리 두 명이 전부다. 그것도 이 인도인 커플은 종일 투어를 하는데 우린 반일 투어 손님이다.
소박한 배 한 척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가이드와 배를 저을 사공까지 여섯 명이 배에 탄다. 사공이 노를 젓기 시작하자 배는 미끄러지듯이 강 위를 흘러간다. 유유자적 흐르는 고요한 수로의 아침은 청명 그 자체다. 온통 초록빛인 강과 나무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물소리와 새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수로를 따라 손에 잡힐 듯 말듯 울창한 야자수 사이에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사람을 태운 배가 떠있는 지금 이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림 속에 있으니 신선이 아니고 무엇일까?
인도 남서부 케랄라(Kerala) 주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은 바로 수로유람이다. 물길이 발달되어 있는 이 지역의 독특한 풍광 사이를 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다. 크루즈 투어 같은 큰 배를 타는 투어도 있지만 우리가 호텔에서 예약한 투어는 작은 보트를 타고 마을 방문도 하는 일정이다.
사공은 뱃머리에서 노를 젓는다. 사람의 힘으로만 움직이는 작은 배라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가이드는 설명이든 농담이든 계속 말을 하는데 사공은 말없이 노만 젓는다. 그게 직업일 테니 나름의 노하우가 있겠지만 안쓰럽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대나무를 짚으로 엮어 만든 배는 천천히 강을 지난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배 젓는 물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강 위에 떠 있다. 유유자적이란 표현이 적확하다.
코코넛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 사이로 현지인들이 거주하는 집이 보인다. 인도의 베네치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배가 있어야 이동이 가능하니 이 집의 자가용은 작은 나룻배다. 집집마다 작은 배가 묶여있다. 집 앞 강가에서 빨래하는 소녀를 지나친다. 여행자에겐 신기한 모습들이 그들에겐 일상이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호수인 듯 잔잔한 강물 위를 노 저어 가는 배 위에서 그림 같은 경치를 바라보고 있으니 진짜 신선이 따로 없다. 강물은 거울이 되어 나무를 비춘다. 자연이 그리는 데칼코마니가 잔물결에 일렁이는 것을 바라본다. 배가 나아갈 때마다 물결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인도에 와서 이런 신선놀음이라니,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조합이다. 오로빌이나 수로유람에서와 같이 상상도 못해본 세상에 발 디디게 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함께 수로유람 중인 멋쟁이 인도인 남편과 예쁜 부인은 유쾌한 사람들이다. 남편 라즈는 쾌활하고 풍부(?)한 호기심을 숨기지도 않는다. 그에 비해 가이드의 얼굴은 눈에 띄게 시무룩하지만, 라즈의 말재간에 금방 무장해제된다. 가이드는 오늘 배에 탄 손님이 네 명 밖에 안돼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며 그제야 이야기를 한다. 이제 라즈는 궁금하던 것들을 가이드에게 물어보느라 정신이 없다. 라즈 덕분에 가이드의 기분이 풀려 다행이다.
사리나 펀자비를 입지 않은 청바지 차림의 부인과 라즈는 마치 신혼부부 같아 보이지만 아이들이 둘이나 있는 오 년차 부부다. 계절이 겨울이라 추운 북인도에서 온 그들 부부는 무더운 케랄라의 날씨가 놀랍기만 하다. 스위스에서 3년을 일했다는 부부는 델리에서 사립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곳 케랄라 주의 교육에도 관심이 지대하다. 한 배를 탄 한국인에게 한국의 공교육과 사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것은 기본이다. '사교육'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람만 많이 쓰는 줄 알았는데, 인도인과 사교육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고즈넉한 자연의 품안에서 사교육이라는 화제가 어울리지는 않지만 라즈의 쾌활함이 분위기를 살리는 것은 사실이다.
델리 출신의 라즈가 코친 출신의 가이드에게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같은 나라 사람들이 맞나 싶다. 북인도의 추위와는 전혀 다른 더운 날씨에 대한 감탄, 지방에 따라 다른 교육 수준과 교육 방법의 비교 등 그들의 대화만 듣고 있어도 인도가 얼마나 큰 나라인지 실감이 난다.
케랄라는 열대 몬순 기후 지역이라 쌀농사가 연간 4모작도 가능하다고 한다. 게다가 해산물도 풍부하다. 그래서인지 케랄라는 인도의 다른 주보다 영아사망률은 가장 낮고 평균수명은 높다. 교육 수준도 높아 문맹률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이 결과는 특이하게도 인도의 현대사 중에서 이 지역이 공산당의 집권 지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80년대 인도의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성장 없는 분배 어쩌고 하는 논리에 쇠퇴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케랄라의 소득 수준은 인도 평균치에 미치치 못하는 데 교육 수준은 최고라는 거다. 생각해보니 거리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없었고 그래서 거리가 더 깨끗해 보였던 것 같다.
신선 유람에 한창이던 배를 강가에 댄다. 고요하던 마을의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집에서 몇 사람이 얼굴을 내민다. 전혀 바쁘지 않은 몸짓으로 집 앞의 좌판을 그제야 살짝 열어 놓는다. 자세히 보니 나무로 깎아 만든 기념품들이 놓여있고 한쪽에는 과자나 음료수도 몇 봉지 진열돼있다.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줄을 걸쳐 놓고 걸어가며 새끼를 꼬는 법을 보여준다. 역시 관심은 라즈가 제일 많다. 라즈가 아니었다면 무뚝뚝한 가이드가 웃지도 않았을 것이고 네 사람뿐인 유람이 조용하기만 했을 것이다. 덕분에 적당히 유쾌하고 충분히 즐길만한 수로유람이 되었다. 열린 마음의 여유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친절하고 유쾌한 라즈는 여기서 파는 감자칩과 소다수를 사서 같이 먹자고 나눠주고는 또 그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다. 코친은 급하게 지나가는 일정인데도 무슨 행운인지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기억에 남지 않을 수가 없다.
떠있는 듯, 흐르는 듯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초록의 풍경이 지나간다. 빠른 말투의 라즈와 중저음의 가이드, 그리고 여자 셋의 하이톤의 말소리가 잠잠해지면 사공의 노 젓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그렇게 반나절의 투어가 끝나고 배는 어느 선착장에 가닿는다.
가이드는 아까부터 은근히 종일 투어를 하라며 압박 중이고 라즈도 같이 가지고 조른다. 하지만 우리는 모한 아저씨와의 약속도 있고, 사실 이 정도면 볼 건 다 본 듯해서 아쉽지만 작별을 고하고 배에서 내린다. 라즈 부부는 종일 투어를 신청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가이드와 셋이 남은 수로유람을 할 것이다. 반나절 동안 함께 신선이 되어준 유쾌한 부부는 남은 여행의 행운을 빌어준다.
수로에서 빠져나와 육지를 디딘 우리는 미리 와서 기다리던 택시에 오른다. 화요일이 축제라더니, 준비가 한창인 거리에 노란 리본들이 펄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