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마인드의 인도 아저씨

에르나꿀람에서 만난 인연

by Girliver

깐야꾸마리를 떠난다. 인도 대륙의 남쪽 이 작은 마을에 과연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기차에 오른다. 아침 10시 반 출발, 오후 5시 30분 도착인 이 기차는 코치(Cochi)를 향해 간다. 깐야꾸마리가 최남단에 있다 보니 이동시간이 제법 걸린다. 기차도 역시 3A를 타서 쾌적하긴 하지만 낮 이동이라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깐야꾸마리가 시발역인 탓에 승객도 별로 없는데 마침 옆 칸에 한국인 남자가 두 명 들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해보지만 반응이 좀 미지근하다. "아..예..."가 끝이다. 말 걸은 것이 후회가 된다. 이국의 여행지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서로 반갑게 인사 정도는 나눠도 될텐데... 머쓱해져서 자리에 돌아와 깐야꾸마리 과일가게에서 사 온 바나나와 석류를 까서 먹는다.


바로 그때, 옆 자리에 캐리어를 밀고 들어온 배가 볼록 나온 콧수염 인도 아저씨가 웃으며 말을 건다. 중국인이 오너인 글로벌 여성용품 회사의 컨설턴트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저씨의 이름은 모한이다. 피부빛과 혈관의 색을 보면 건강상태를 알 수 있다고 팔을 내밀어 보라고도한다. 그것도 부족해서 노트북을 꺼내 회사 홈페이지를 보여주고 급기야 한국의 제휴회사 홈페이지까지 알려준다.


인도 곳곳에서 상품을 소개하고 상담하는 모한은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는 인도의 대도시를 돌며 일하고 때때로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나라로 출장도 간다고 한다. 지금은 첸나이에서 깐야꾸마리로 와서 일하고 다시 코치로 가는 중이다. 코치는 그가 현재 사는 도시지만 아내도 이 일을 해서 지금 첸나이에 가 있고 딸은 대학생이라 집에 없어서 집으로는 가지 않는다. 호텔에서 자고 내일 일한 다음 다시 첸나이로 가야 하는 바쁜 스케줄의 소유자다.


적극적이고 이야기 좋아하는 모한 덕분에 즉석에서 페이스북 친구까지 하게 됐다. 하지만 장황한 이야기에 지친 동행은 쉬고 싶다며 이층의 자기 자리로 올라간다. 나도 슬슬 이 아저씨가 좀 피곤해진다. 너무 자기자랑만 하는 것 같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저씨의 눈길을 무시하고 한잠 자야겠다고 이야기를 멈춘다.

졸다가 깨다가 창밖을 보다가 음악 듣다가 가이드북 보다가 드디어 코치의 에르나꿀람(Ernakulam) 역에 도착한다. 그 사이 사람들로 가득 찼던 객차에서 한참을 줄 서서 역에 발을 디딘다. 숙소가 많은 에르나꿀람 시가지로 가야 한다.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거대한 도시의 기차역 앞은 사람들로 붐빈다. 오토릭샤를 타야 하는데 줄도 길고 사람도 많고 막막하다. 때로는 이런 느낌을 헤쳐 가는 것이 여행이지만 최남단 마을의 고즈넉함을 잊기도 전에 도착한 대도시의 해지는 풍경이 다른 날보다 더 낯설다.


그렇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모한 아저씨가 빙그레 웃으며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밀고 다른 손으로는 서류가방을 들고 나타난다. 우리가 숙소를 예약하지 않을 것을 알고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된다. 오늘이 토요일인데 다음 주 화요일부터 열리는 축제 때문에 호텔 구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그가 갑자기 캐리어와 가방을 우리에게 맡기고는 사라진다. 그리고 잠시 후, 프리페이드 오토릭샤 부스에서 그가 손짓을 한다. 오토릭샤를 예약하고는 우리 보고 자기 짐을 가지고 오라는 거다. 영문도 모르고 배낭을 들쳐 메고 모한의 짐을 끌고 그에게 간다.


"난 이미 호텔을 예약했어. 그런데 거긴 4성급 호텔이라 너희에겐 너무 비싸. 그러니 릭샤를 함께 타고 가자. 내 호텔로 가는 길에 너희 숙소를 알아봐 줄게"


해는 지고 축제라 방이 없을 까 봐 막막한데 이렇게 도움을 받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아까 기차에서만 해도 자기자랑 잘하는 중산층 인도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친절을 베풀어 주다니.... 그는 감사하는 우리를 토닥이며 어느 정도의 가격을 예상하느냐 묻고는 숙소를 찾기 시작한다. 처음 들른 호텔은 괜찮았지만 빈 방이 없었다. 거기서 소개해준 그 뒤편의 다른 호텔에 머물기로 한다. 릭샤를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우리를 데리고 내려서 방을 물어보고 다시 릭샤를 타고 다시 내린 호텔에 빈 방이 있다는 걸 확인하자 굳이 룸 상태까지 꼼꼼히 체크하는 수고를 모한 아저씨는 마다하지 않는다. 게다가 1시간 후에 식사를 하자고 저녁 약속까지 잡고는 기다리는 릭샤를 타고 자기 호텔로 간다.


정확히 1시간 후 그는 다시 우리 호텔로 온다. 코치에서 꼭 해야 할 수로 유람(Backwater tour)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오늘 호텔에서 예약해야 한다. 프런트의 인도인 주인과 그 얘기를 하며 반나절 프로그램을 할까, 아니면 하루 종일 하는 프로그램을 선택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들어온다. 눈짓을 하며 방으로 올라가자 하더니 종일 프로그램은 상관없는 코끼리 투어를 포함해서 괜히 비싸니까 반일 투어만 하라는 거다. 가만보니 이 아저씨, 약간은 일방적인 것 같으면서도 꼼꼼하게 일처리를 해주는 모습이 꼭 아빠나 삼촌의 마인드다.


다시 프런트로 내려와서는 굳이 본인이 프런트 직원과 이야기하면서 이것저것 체크한다. 직원은 대체 왜 인도 아저씨가 한국 여자들을 챙기는지 어리둥절한 눈치다. 어리둥절한 건 솔직히 우리도 마찬가지다.

야경이 아름답다며 그가 데리고 간 곳은 바다가 보이는 도심이다. 지금도 대도시인 코치는 예전에는 향신료 항구였고 식민지배 이후에도 무역항으로 유명했던 도시다. 포트 코친은 코치의 네 구역 중에서 항구가 있는 신도시 쪽이라 쇼핑몰과 전망 좋은 아파트까지 어우러진 해변 경치는 대도시의 그것이다.


하나뿐인 딸이 어릴 때 자주 함께 산책 다니던 길이라는 설명을 곁들이는 모한 아저씨는, 바빠서 이젠 그것도 못한다며 쓸쓸히 웃는다. 까만 아저씨의 얼굴이 어느새 우리나라 여느 가장의 그것과 닮아있다.

밤의 항구를 구경하고 토박이인 그가 알려준 대로 대략의 지리도 익힌다. 그가 추천한 "Indian Coffee House"라는 이름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이름은 커피 하우스지만 현지인이 많이 오는 넓은 식당이다. 도사(Dosa)와 라임주스까지 맛있는 식사다. 마치 사설 가이드 같다고 하니까 자신의 귀여운 콧수염을 흔들고 하얀 이를 보이며 활짝 웃는다. 길 모르는 우리를 다시 숙소까지 데려다주고는, 내일 자신의 일이 끝나고 4시에 올 테니 수로 유람 다녀오면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 로비에서 만나자고 하신다. 빙그레 웃으면서도 약속은 일방적으로 잡는 친절한 단호함이 고마우면서도 웃음이 난다.


숙소에 돌아와 에어컨도 없어 커다란 팬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눕는다. 눅눅한 바람이 불어도 동행과 나는 마냥 즐거워 하루를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다. 유쾌한 아빠 마인드 모한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어둑해진 코치의 뒷골목을 무거운 배낭을 앞뒤로 메고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을 일컬어 행운의 날이라고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