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떠나온 지 40일째, 여행이 일상이 되다
오늘의 할 일은 볼리비아 비자를 받는 일이다. 남미 나라들 중에서 볼리비아는 입국 시 비자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미리 황열병 예방 접종을 하고 와서 예방 접종 증명서와 사진, 신용카드 복사본을 준비해서 볼리비아 대사관으로 간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길 한복판이 공사 중이다. 기사는 그냥 거의 다 왔으니 내리라는 눈빛이다. 돌아서 대사관 앞으로 가달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라 그냥 내려서 걷는다. 이럴 땐 스페인어도 못하면서 남미에 온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치민다. 일단 대사관으로 들어가 순서를 기다린다. 혹시라도 비자발급이 안 될까 봐 공손히(?) 비자를 받아 나온다. 이제 페루에서 볼리비아로 넘어갈 준비는 끝났다. 후련하다.
다시 돌아온 쿠스코의 아르미스 광장엔 햇살이 가득하다. 어젯밤 늦게 도착했을 땐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무지 걱정했는데 활짝 개였다. 광장에서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버스에서 우르르 내려 여행자의 눈길에도 아랑곳 않고 어딘가로 향하는 것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이색적이다.
며칠 전 쿠스코 왔을 때 다 둘러본 풍경 같은데 오늘 다시 보니 또 다른 광경이다. 처음엔 광장의 사람들과 대성당, 교회, 아케이드 같은 건물만 보였는데 오늘 눈에 띄는 것은 자동차들이다. 보이는 것을 다 수용할 수 없으니 보고 싶은 만큼만 보게 된다.
피곤한 몸도 쉬고 정리도 하려고 스타벅스에 들어간다. 스타벅스나 맥도널드에 오면 아이러니하게도 향수병이 도진다. 해발 3,300미터의 하늘과 구름이 탐스러운 유리창 밖의 풍경만 빼면 마치 한국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익숙한 분위기와 맛 때문일 것이다.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여행도 정리하고 지인들에게 엽서도 쓴다.
조카에게 선물하려고 산 작은 페루 인형과 아까 만난 민속의상을 입은 페루 처녀의 모습이 똑같아서 웃음이 난다. 민속의상을 입고 어린 야마를 들고서 1 솔(약 400원)을 받고 사진을 찍어주는 게 그 처녀의 직업(?)이다.
한국을 떠나온 지 40일째, 쿠스코의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처음엔 여행이라는 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도 했었는데 이젠 내가 여행자라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여행 속에 빠져 있다. 모든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대체로 큰 틀에서는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 그 "큰 틀"이라는 게 별 탈 없이 여행을 마치는 정도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스름한 오후 광장을 거닐다가 중앙시장(Santa Ana)으로 가본다. 큰 시장에는 갖가지 물건들, 치즈며 과일이며 음식을 파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오늘은 시장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 오후의 시장에는 장 보러 나온 키 작은 인디오 아줌마들이 커다란 엉덩이를 흔들며 장을 본다. 말은 안 통해도 그럭저럭 찐 옥수수와 바나나를 조금 사가지고 돌아 나온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어느새 해가 진다. 아무 일도 없는 이런 여행이 여행을 더 여행답게 한다. 세상의 배꼽이니 하는 화려한 수식어보다, 그저 쿠스코라는 도시에서의 밋밋한 하루가 아름다운 노을로 마감되는 이 시간이 좋다.
구름이 태양을 어떻게 가린 건지 감탄만 나오는 하늘빛이 아름다운 저녁이다. 쿠스코에서는 그저 하늘만 보고 있어도 기운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