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낯설지만 잔잔했던 한나절의 트레킹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Parque Nacional Tierra del Fuego).
우수아이아의 서쪽에 위치한 넓은 공원으로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야생동물의 천국이다. 마젤란(Magellan)이 세계 일주를 하며 이곳을 지날 때 이 땅의 불빛을 보고 지은 이름으로 그것은 원주민의 횃불이었다고 한다.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는 불의 땅이라는 뜻이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 만년설의 흰색에 그 회색 구름의 색채를 더해 수묵화 같은 장면을 연출할 뿐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호수 가장자리에 까맣게 보이는 것은 놀랍게도 홍합이다. 홍합은 바다에서만 사는 줄 알았는데 민물에도 사나 보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채 풍경의 일부가 되어있다.
트레킹 코스를 선택해서 이정표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걷는다. 드넓은 공원이라 셔틀버스들이 다니는 길도 있다. 정류장 역할을 하는 지점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버스가 지나가니 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조차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것이 최상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다가, 이미 내 발걸음도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연의 일부임을 자각하고 그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일이지만 그마저도 쉬운 것이 아니다.
고즈넉한 가을 풍경인 듯, 작은 웅덩이 옆에는 제멋대로 자란 풀이 이곳의 거센 바람에 눕는다. 이름 모를 각양각색의 풀들이 이 고요한 들판에 누워 있는 것에도 어떤 식으로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만큼이 지구라면 나는 이 풀밭 어디를 꼼지락거리며 기어갈 작은 곤충은 될까?
야생동물들의 천국이기도 하다는 데 동물은 만나지 못하다가 서성거리는 새들을 만난다. 이곳의 새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 볼 일을 본다. 안심하고 아플 수 있고 안심하고 죽을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란 말이 떠오른다. 저 새는 최소한 사람이 위험하지 않다고 느끼는 듯하다. 이 국립공원 안에서 이 생물들은 인간의 개입 없이 자연의 법칙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은 좋은 세상임에 틀림없다.
남미는 어딜 가도 낯선 모습들, 처음 만나는 풍경들이어서 여행자를 더욱 설레게 했다. 아시아의 어느 나라들처럼 한국과 가깝지도 않으니, 이왕 지구 반대편에 온 이상 무엇하나라도 더 보고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일까? 페루에서 칠레로, 아르헨티나로 그렇게 휘몰아쳐 왔던 것 같다. 여기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에서의 느린 발걸음들이 그 폭풍에서 벗어날 여유를 준다.
북반구는 겨울인 2월인데, 계절이 반대인 남미는 뜨거운 여름, 여기 우수아이아에는 늦가을의 스산함이 가득하다. 머리로 인식하는 계절과 피부에 와 닿는 계절이 헝클어져 계절 감각이 무뎌지지만 오늘 마주하는 이 상쾌한 바람과 가벼운 발걸음은 그것을 상쇄할 만큼이나 좋다.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새 머리는 맑아오고 솜사탕처럼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트레킹을 마친다. 결코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지구 반대편의 어느 숲이 사랑스럽기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