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33주, 입원에 적응하려고 노력중입니다.

아이와 나의 새로운 언어를 기대하며.

by 올리비아 킴



병원에 있다 보니 33주가 됐다.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아가는 게 아니라 얼른 빨리 날짜를 넘겨버렸으면 하는 마음에 하루 보내는 소중함을 못 느끼고 있으니 이것대로 속상함이 밀려온다.


병원은 다섯시에서 다섯시 반 사이에 잠을 깨운다. 라보파가 잘 들어가고 있는지 수액을 먼저 체크하고, 그다음 간호사가 와서 혈압을 재고, 그다음 간호사가 와서 태동 검사를 한다. 태동 검사를 할 땐 늘 긴장된다. 혹시나 수축이 발생해서 집에 못 가게 되는 수치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잔뜩 긴장해서 꼼짝 않고 누워 있는다. 혹시나 숫자가 튀면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처음엔 태동 검사에서 들리는 아기 심박수가 신기했는데, 이젠 아기 심박수보다 수축 수치만 노려보게 된다. 이게 낮아야 집에 갈 텐데 말이지…



그리고 나면 당직의 회진이 시작된다. 오늘은 어떤 담당 회진 의사분이 올까. 몇 초 걸릴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 아… 과장님!! 내 담당 과장님이 들어오시자마자 반가움 반 원망 반이 솟구쳤다. 날 가둬놓고 대체 일주일 동안 어딜 가셨던 거예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선생님 저 언제 집에 갈 수 있나요,라고 묻자 의사 선생님 눈썹이 팔자로 변하며 그래도 34주는 최소, 그리고 36주까지는 있어봐야.라고 말해서 나도 모르게 36주요?! 안돼요…라는 투정이 새어 나왔다.

의사 입장에선 아이를 생각하지 않는 산모라는 생각이 들었겠지. 내가 계속 투정을 부리니 일단 참아보라는 말과 빈혈 수치가 너무 좋지 않아서 철분주사 처방을 내리곤 옆 침대로 가버리셨다.

그래도 오늘은 1분은 말했구나. 동시에 또 한줄기 희망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다음 주면 그래도 퇴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36주라니. 2월 한 달 내내 있다가 그냥 애를 낳으라는 건가…

한차례 또 콧등이 시큰해졌다. 아니, 참지 말고 좀 울어야겠다. 블로그로 비슷한 주수를 찾아보면 다들 행복한 임신 말기를 보내는 일기들을 쓰는데 나는 이렇게 병원에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우울감에 시달리면서, 오히려 아이에게 더 도움 되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니 분해서 눈물이 더 차올랐다. 원망과 억울함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혼미해지던 찰나, 간호사가 초음파 외래를 다녀오란다.

폴대를 질질 끌고, 외래를 보러 갔다. 다른 병실을 쓰는 비슷한 주수처럼 보이는 외국인 한자의 라보파에는 8가트라고 적혀져 있다.


한자리 숫자가 부럽다.

자궁경부 길이는 2.02로 열흘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솔직히 좀 늘어나지 않았을까,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더 짧아지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까. 과장님이 약간 움푹 팬 것도 보인다고 해서 더 좋아진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이는 1주일 사이에 고작 36그램만 늘었다. 매번 검사 때마다 4~500그램씩 크던애가… 배 둘레는 오히려 줄었다. 먹고 눕기만 해서 애가 더 커졌나 싶었는데, 그냥 내 살만 늘었나? 아이가 거의 자라지 않아서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가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럴까? 매일 울면서 힘들어해서 아기도 힘들어 한 걸까? 아니면 병원 밥이 진짜 부실해서 그런 걸까?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의사선생님은 전적으로 아기의 건강과 생존을 생각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나는 더 퇴원을 말하지 못했다.

외래를 보고 나오는데 기운이 쭉 빠졌다. 꿈도 희망도 없이 그냥 체념하게 됐다. 죄책감도 함께 밀려왔다.


나 때문에 아기가 더 크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최소한의 책임감만 갖춘 사람이라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아무 죄 없는 아기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자리에 올라오니 간호사가 헤모글로빈 수치를 언급하며 1월 28일에는 10 정도였는데, 엊그제 피검사에서는 8까지 떨어졌다고 했다.

철분제 문제인지, 밥 문제인지. 간호사도 밥을 잘 먹어야 하는데, 휴 병원 밥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원래 헤모글로빈 수치가 좋은 편은 아니어서 헌혈도 못했었지만, 이 또한 아기에게 안 좋다고 하니 오늘은 종일 미안한 일만 생기는 것 같다.

10분 정도 소요되는 철분주사를 링거로 맞고, 저녁에 다시 맞는다고 했다. 왼쪽 팔엔 이제 찌를 데가 없어 보여서 간호사가 한참을 혈관을 찾다가 간신히 팔꿈치 쪽 혈관에 주사를 놓아주었다.

2월 2일에 세 번째로 교체한 라보파 링거주사를 다시 교체할 시기가 돼서 철분주사를 다 맞고 나면 오늘 주사를 제거하고 샤워한 후 새 주사로 바꾸자고 했다.

열흘 만에 샤워하는 거라고 하니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간호사가 자리를 비우고 폴대에 매달린 철분주사를 보니 살면서 별걸 다 맞아보네ㅡ라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사이에 여태 햇살이의 초음파 영상을 하나씩 돌려봤다



햇살이의 콩알부터 시작해서 동그란 링 속의 젤리 곰, 10주 차에 걱정했던 목 투명대 영상의 조그마한 생명체, 정밀 초음파에서 처음으로 본 사람 형체, 그리고 꼬물거림. 입체 초음파의 얼굴.

병원 영상 화질이 좋은 편이 아니라 여태 대충 봤던 영상들을 꼼꼼하게 보고 있으니 내가 이 아이를 처음부터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눈물로 쏟아졌다.


어쩌면 많이 사랑하고 있지만,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고, 어떻게 느껴야 할지, 어떻게 그걸 표현해야 할지, 표현의 부끄러움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리고 아직도 사실 어떻게 이 감정들을 언어로 나열하고 표현해야 할지 여전히 실재의 영역과 상징의 영역에 걸쳐져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


라디오에서는 에바 카사디의 imagine(존 레논)이 흘러나온다.

평화를 상상하는 노래 가사처럼, 나도 퇴원해서 행복하게 출산일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요즘 에바 카사디의 노래가 듣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때마침 그녀의 음성이 이 시간 내게 위안을 준다.

지금 나의 우선순위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뀐다.

내가 우선이었다가도 햇살이가 우선이기도 하고, 남편이 우선이기도 하다. 종종 돌이 지난 조카와 영상통화를 하거나, 조카의 사진을 보면서 우리 햇살이도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줄 수 있었으면 한다.

얼마 전까지 이런 시간이 희생이라고 의미를 붙였다. 그래서 남편도 햇살이도 의사도 내 몸도 미웠다.

다만, 오늘 강의에서 백상현 님이 기표 물성에 대해서 설명하던,

[아기들에게 보석처럼 빛나는 기표, 엄마와 주고받는 신비로운 언어]를 나도 햇살이와 함께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나와 햇살이 사이에 완전한 상징계가 스며들기 전에, 그 매혹적인 언어들을 나의 딸과 소중히 나누는 시간에 머물고 싶다는 새로운 욕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