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다’보다는 ‘달다, 시다, 짜다, 쓰다, 맵다’가 낫고, 그보다는 ‘달콤하다, 새콤하다, 짭쪼름하다, 쌉싸름하다, 매콤하다’가 낫다. 백 보 양보해도 ‘맛있다’는 ‘마시쩡’만 못하다. ‘맛있다’는 두루뭉술하고 관념적이다. 혀의 감각과는 무관하다. 판단이며 생각이다. ‘맛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맛으로 가는 문은 굳게 닫힌다. 눈으로 보고, 코로 맡고, 혀로 굴려보고, 어금니로 조심스럽게 씹어봐라. 입안에서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느껴라. 그 후에 보고 느낀 바를 구체적인 언어로 섬세하게 표현하자. 글쓰기는 ‘맛있다’를 지우고, ‘어떤’ 맛이 나는가를 적는 것부터 시작한다.
‘재미있다’ 역시 ‘파안대소(破顔大笑)’만 못하다. 얼굴(顔)을 깨뜨리며(破) 크게(大) 웃는다(笑)니, 굴욕사진이 남을 만큼 이미지를 신경쓰지 않고 웃는 연예인이 떠오른다. 정말로 웃겼구나 싶다. 한자어라도 이만하면 순우리말 부럽지 않다. 반면 ‘정말 재미있다’는 ‘정말정말’ 재미있더라도 ‘꿀잼’만 못하다. 꿀잼은 아기자기한 맛이라도 있지만 ‘재미있다’는 어감도 투박하고 의미도 불투명하다. ‘재미있다’는 표현은 문장에 남은 온기와 생기를 빨아들인다. 이 단어가 문장에 박히면 글이 죽는다.
‘좋다’는 어떤가. 대체 얼마나 좋길래 “좋다”라 쓰고, 얼마나 나쁘길래 “나쁘다”라고 적는가. ‘나쁘지 않다’는 얼마만큼 좋은 것이며, ‘좋지 않다’는 얼마만큼 나쁜 것인가. 앞의 문장이 선문답처럼 모호한 이유는 ‘좋다’와 ‘나쁘다’가 그만큼 모호하기 때문이다. 정도를 가늠하기 힘든 형용사는 주관적이고 불투명하다. 특히 대체할 수 있는 단어폭이 넓어 자주 쓰는 ‘좋다’는 그만큼 부정확하다. ‘좋다’ 하나가 ‘사랑한다, 착하다, 우수하다, 견고하다, 호감이 간다’ 따위를 대체할 수 있는 만큼, 꼭 ‘좋다’를 써야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용하는 어휘 수를 늘리고 정확한 언어를 알맞은 자리에 넣기 시작하면 ‘좋다’만큼 불필요한 단어도 없다.
구체적으로 적고 감각적으로 표현하기. 이를 묘사라 한다. 흔히 묘사를 소설 쓰기의 기법쯤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논술 수업에서 “묘사하듯 적어라”라고 말하면, 학생은 “묘사는 소설에서나 하는 거 아녜요?”라고 반문한다. 묘사라는 단어에서 멋진 수사나 미사여구를 떠올려서 생기는 오해다. 구체적으로 적고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묘사의 기법은 모든 글쓰기의 기초다. 정확한 언어로 생각을 적는 글쓰기 자체가 묘사라고도 볼 수 있다. 묘사는 애써 멋을 내서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미지로, 감각으로 받아 안은 것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작가의 부단한 노력이다.
모든 생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자. 생각과 단어의 의미가 그대로 포개지도록 노력하자. 그물코가 넓으면 작은 생선들을 놓치는 것처럼, 두루 쓸 수 있는 단어들로 글을 쓰면 생각을 놓치게 된다. 다음은 구체적인 표현을 막는 ‘그물코가 넓은 표현들'이다.
것
‘것’은 사물‧현상 따위를 추상적으로 지칭하는 의존명사다. 활용도가 높아 “네 것은 저기에 있어”처럼 특정 문장 성분을 대신하기도 하며, “흡연은 담배에 해로운 것이다”처럼 명사문을 만들기도 한다. 글을 처음 쓰는 초보자들이 ‘것’을 자주 쓴다. “앞에서 진술한 것처럼 내가 이 글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것이다”같이 적는다. ‘것’만 있으면 글 하나는 뚝딱 쓴다.
‘것’은 포용력이 남다르다. 많은 대상을 아우른다. 망망대해에 펼쳐놓은 그물같다. 고등어를 잡으려고 던진 그물에는 삼치도 잡히고 이따금 해파리도 올라온다. 어부들로선 분류하는 데에만 수 시간이 걸린다. ‘것’ 역시 활용도가 높은 의존명사인 만큼 남용하면 글의 내용을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만든다. ‘것’이 지칭하는 바를 끊임없이 추측하게 해 독자로 하여금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
‘것’이라 쓰기 전에 생각한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로 써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어휘가 글을 좀 더 명료하게 만들 것이다. 반면 구체적인 단어로 바꿀 수 없는 ‘것’은 대부분 ‘점’ 혹은 ‘사실’로 바꿀 수 있다. 단어를 바꾸는 방법도 ‘것’을 줄이는 한 가지 방법이지만 문장의 구조를 달리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ㄴ/은/는 것이다’ 꼴로 명사문을 이끄는 ‘것’이 있다. 전에 일어났거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앞에서 말한 내용을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담배는 건강에 해로운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인 것이다”의 ‘것’이 그렇다. 그러나 ‘것’이 이끄는 명사절 문장은 기본적으로 강조하는 문장이므로 자주 사용해선 안 된다. 화제와 의견을 정리하는 문단의 말미에나 사용하는 게 좋다. 특히 문단의 첫 문장에 써선 안 된다. 이 유형의 명사문은 이미 제시된 정보를 받아서 보완하므로 ‘최초의 정보’를 담을 수 없다.
~에 대해, ~에 관해, ~을 통해
“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해.” 친구가 내뱉는 이 말만큼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이 있을까.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발화자는 친구에게 자신을 알려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을까 싶다. 이 대화만 해도 그렇다. ‘~에 대해’는 지나치게 모호하지 않은가. ‘~에 대해’는 ‘형편’일 수도 있고, ‘가정 환경’일 수도 있다. ‘취향’이나 ‘기호’일지도 모른다. “네가 내 생각을 얼마나 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해”라고 말하거나, “네가 내 처지를 얼마나 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해”라고 말해도 될 텐데 왜 하필 ‘~에 대해’인가. 이렇게 단어 하나를 써도 모호하게 쓰는데 그 친구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에 대해’, ‘~에 관해’, ‘~을 통해’는 글을 처음 쓰는 초보자들이 특히 자주 쓰는 표현이다. 초보자들은 ‘노령화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대신 ‘노령화 문제에 대해[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라고 적는다. 후자는 글감을 환기할 뿐 주제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는다.
‘~에 대해’, ‘~에 관해’와는 쓰임이 다르지만 ‘~을 통해’ 역시 글을 모호하게 만든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한 단계 성숙한다’보다는 ‘사랑의 시련으로 우리는 한 단계 성숙한다’가 명확하다. 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에 대해’, ‘~에 관해’, ‘~을 통해’를 붙여 문장을 뭉뚱그리게 된다.
‘~에 대해’, ‘~에 관해’, ‘~을 통해’는 많은 경우 문장을 늘어지게 한다. 조사 한 단어로도 충분한 자리에 ‘~에 대해’, ‘~에 관해’, ‘~을 통해’를 넣으면 문장이 길어지고 글의 리듬이 망가진다.
동사와 형용사
그는 정말이지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불쾌하고 땅딸막한 남자다.
그는 앉은 채로 거들먹거리며 걷는다.
이렇게 나를 조롱하는 여인이 있다면, 나는 그녀를 일방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말은 내가 들어 본 조롱 가운데 최고다. ‘앉은 채로 거들먹거리며 걷는다’는 말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더 이상의 첨언과 수정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말보다 아름다운 말은 없다.
첫 문장의 ‘불쾌하다’, ‘땅딸막하다’는 훌륭한 형용사다. 특히 ‘땅딸막하다’가 그렇다. 만약 이 단어 대신 ‘뚱뚱하다’나 ‘돼지같다’고 말했다면, 이 문장은 반드시 실패했을 것이다. ‘땅딸막하다’는 표현은 뱃살이 셔츠 단추를 악착스레 괴롭히는 키가 작은 남자를 떠오르게 한다. 구체적이며 감각적이다.
그러나 이 문장을 그저 그런 문장에서 탄성을 지르게 하는 문장으로 바꾸는 것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다. “앉은 채로 거들먹거리며 걷는다”의 ‘거들먹거리다’와 ‘걷는다’가 그렇다. 형용사로 섬세하게 깍아놓은 조각에 동사가 생명을 불어넣는다. 동사는 진술의 오류를 가볍게 무너뜨리고 앉은 채로 거들먹거리며 걷는 한 남자를 창조한다.
그 남자는 풍성한 살집을 출렁이며 뒤뚱거린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오디세우스의 모험처럼 위태롭다. 남자는 몇 걸음 걷더니 지쳤다는 듯 회전의자에 몸을 깊게 묻는다. 회전의자는 체중을 힘겹게 버텨내며 천천히 돌아간다. 누운 듯, 앉은 듯 몸을 뒤로 젖힌 남자는 가래를 삼키듯 말을 한다.
형용사를 쓴 글이 창작이라면 동사를 쓴 글은 출산이다. ‘쉰이 넘은 그 여자는 꽥꽥 고함을 질렀다’는 ‘쉰이 넘은 그 여자는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말했다’에 비해 활력이 넘친다. 형용사는 동사에 비해 구체적이며 선명하다. 활기를 불어넣는 문장을 쓰려면 형용사보다는 동사를 먼저 떠올려야 한다.
구체적인 정보
쪼개고, 부수고, 나눠라. 구체적으로 글을 쓰려면 생각을 잘게 조각내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 “소년은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문장을 보자. ‘불우하다’만으로 충분한가. ‘불우하다’는 관념은 덩어리가 지나치게 크다. 불우한 가정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소년은 부모의 고함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짐승처럼 숨죽여 잠들곤 했다’처럼 ‘가정이 불우한 이유는 무엇인지’, ‘얼마만큼 불우했는지’, ‘소년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불행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잘게 쪼개 생각하고, 문장에 정확하게 옮겨 적어야 한다.
생각을 잘게 조각내려면 대상을 나누어 관찰해야 한다. 나는 처음으로 사랑했던 그녀가 어떤 농담에 웃고, 어떤 농담에 웃어줬는지를 기억한다. 정말로 웃을 때는 눈가에 잘게 주름이 지고 광대에 살이 도톰하게 차올랐던 반면 웃어줄 때는 입꼬리가 평소보다 높이 올라가고 눈이 살짝 처졌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너는 충분히 유쾌한 사람이야’라고 소곤대듯 규칙적으로, 의무적으로 웃곤 했는데, 나는 그녀가 정말로 웃을 때와 웃어줄 때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 때까지 미소를 수백 번 지켜봤다. 그녀는 얼굴로 웃는 게 아니라, 눈으로 웃고, 입술로 웃고, 보조개로 웃었다. 수백 번의 웃음을 본 뒤에야 나는 그녀의 웃는 모습을 기억할 수 있었다.
미술 교사였던 피카소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비둘기 발을 반복적으로 그리도록 했다. “그동안 비둘기 발밖에 그리지 않았지만, 열다섯 살이 되자 나는 사람의 얼굴, 몸체들도 다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피카소는 비둘기 발을 반복적으로 그리며 발톱의 모양이 아니라 발톱의 결을, 주름이 아니라 주름 사이의 간격을, 색이 아니라 색의 변화를 관찰했을 것이다. 비둘기 발을 보며 피카소가 훈련한 것은 비둘기 발을 그리는 소묘법이 아니라, 대상을 상세히 관찰하는 방법이다. 자세히 관찰하면 묘사는 저절로 이뤄진다.
상위어와 하위어
상위어와 하위어는 글쓰기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구체적으로 쓰려면 상위어보다는 하위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좋다. 개라고 쓰지 말고 ‘포메라니안’이라 쓰고, 그보다는 ‘하얀 털 사이로 눈과 코가 검정콩처럼 박힌 화이트 포메라니안’이라 쓰자. ‘자동차가 멈췄다’고 쓰지 말고 ‘15년간 몰던 아버지의 소나타가 도로 위에 주저앉았다’라고 써라. 상위어보다는 하위어가 좀 더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