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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Jan 16. 2017

<눈먼 자들의 도시> 리뷰

눈을 감고 탐욕을 뜨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된다면? 기발하면서도 잔인한 상상이다. 알 수 없는 병으로 인간들이 하나씩 감각을 잃어가며 종말로 향해가는 과정을 담은 데이비드 맥킨지 감독의 <퍼펙트 센스>조차도 시각은 가장 마지막에 잃게 했다. 그만큼 본다는 행위는 인간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시각을 잃은 세상을 끔찍하게 재구성했다. 관객들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주인공의 시선에 의지한 채 무기력하게 인도당할 수밖에 없다.

 집단적 실명에 빠진 세상에서 인류가 축적해온 수많은 지식들과 유산들은 통과되지 않는 밝은 빛으로 덮어져 그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오로지 극도의 불안감을 벗어나고자 하는 근원적인 욕망만이 인간의 눈이 된다. 영화가 도입부에서 신호등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클로즈업으로 담아낸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맹인들에게 기존에 교통질서를 유지하는데 사용됐던 신호등이라는 사회적 약속은 무용지물이다. 초반부터 도덕률의 붕괴를 예고한 영화는 그 아노미(Anomie) 상태 속에서 맹인들이 어떻게 삶의 질서를 재건할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영화는 현실 속의 정치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국가는 치료와 예방 목적임을 선전하며 집단적으로 맹인이 된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수용소에 감금하고 그저 방치한다. 수용소는 외부의 개입이 없는 이른바 맹인들만의 작은 공화국이 된다. 주인공은 맹인이 된 남편을 따라 수용소에 들어가며 그곳의 참상을 지켜보게 된다. 처음에 맹인들은 자신의 살아왔던 세상의 규칙들을 지켜가며 공동체를 유지한다. 하지만 수용소의 인원이 초과되고 보급품이 감소함에 따라 도덕적 양심보다는 욕구들이 그들의 눈을 메우기 시작한다.

 총을 소지한 자칭 ‘3 번왕’의 등장으로 수용소는 소수집단이 식량을 독점하고 강제적으로 식량을 귀중품과 여자들로 교환하게 만든다. 이른바 (탐욕에) 눈먼 자들의 도시가 도래하는 것이다. 기존에 맹인으로 살아와 더 유리한 입지를 갖게 된 이는 3 번왕의 수하인 노릇을 하며 권력의 향락에 심취한다. 수용소에는 각종 시체와 오물들이 즐비하고 굶주림과 공포에 허덕이는 맹인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주인공의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그에게 있어 주인공은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라 “날 옷 입혀 주고, 씻겨주고, 똥 닦아주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의 양심은 몇 번의 깜빡임으로 증발되고 탐욕은 눈을 감을 수록 또렷해진다

 이를 지켜봐야 하는 관객은 불편하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라기에는 허구적이고, 허구를 기반으로 한 영화라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현실과 허구의 중간 지점에서 목격하게 되는 잔혹한 인간 군상에 몰입하게 될수록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형성해온 도덕률과 철학들은 근원적 욕구 앞에서 너무도 빨리 눈이 멀어버렸다. 우리가 사는 도덕 법칙과 사회규범으로 지탱되고 있는 현대 사회가 인간들의 추악한 본성을 가리는 페르소나(가면)에 지나지 않다는 환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수용자들에게서 이타적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이기적 인간의 도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첫 번째 장면은 주인공이 식량과의 교환을 위해 귀중품을 모으는 장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중품을 내놓지 않는 상황이다. 다른 구성원들의 귀중품으로 식량을 분배받을 수 있으므로 무임승차를 선택하는 이들을 지켜보는 주인공의 표정에서는 허탈함을 넘어  달관을 읽어낼 수 있다.

 두 번째는 참다못한 주인공이 3 번왕을 죽이게 됨에 따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한 폭동이 진행되자 ‘3 번왕을 죽인 자를 잡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상황이다. 그들의 주장 이면에는 3 번왕이 수용소를 유지하기 위해 내건 비도덕적이고 역겨운 규율들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피지배 계급의 남성들은 여성들이 식량을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척하면서도 그로부터 얻게 되는 편의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에 대한 혐오감으로 점철된 세상. 주인공의 표정은 점점 굳어가고 자괴감으로부터 흐르는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메운다. 인간의 시체를 먹는 들개들을 보는 주인공은 이 세상에 자신만 정상이라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한다. 혹은 자신만 비정상인 것 같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맹인들의 세계에서는 종교시설에 있는 우상들조차도 안대를 쓰고 있었다. 맹인들이 신에게 강요한 것인지, 신이 스스로 눈을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렇게 탐욕과 혐오로 뒤덮인 세상이 인간의 진짜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진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우리가 눈이 먼 것일까. 지금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눈이 멀어버린 게 아니라 보지 않는 것이다. 이 여자는 어떤가? 지금은 기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 여자는 끔찍하게 이 순간을 기다려온 이 여자는 지금, 갑자기 자유를 느낀다. 벌써 그녀는 광활한 도시에 소리치고 싶다. ‘난 볼 수 있다’ ”   

 

 영화의 결말, 맹인들은 시각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질문들은 명쾌히 떠지지 않았다. 주인공은 예전처럼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 것인지, 맹인들은 재앙에 가까웠던 자신들의 욕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삶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인지. 영화의 중간중간 눈이 멀어 버릴 듯 눈부신 흰 빛이 반복돼 등장하는 것은 눈을 감아도 씻어낼 수 없는 인간의 이기심 내지, 탐욕에 대한 각인일지도 몰랐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영화였지만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분출해낸 의미 있는 영화였다.

Movie Street 소속 직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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