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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우 Dec 20. 2022

먼저 떠나신 외할머니 생신 하늘나라로 떠나신 로맨티스트

반평생을 강직하고 곧은 군인으로 살아오셨던 외할아버지가 오늘 새벽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작년 4월 찾아뵐 때까지만 해도 아흔이 넘은 연세에 비해 너무 정정하셔서 놀랐었는데 안타깝게도 불과 일 년 만에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실 만큼 쇠약해지셨다. 반평생을 강인한 군인으로 살아오셨던 외할아버지에게 병상에 누워 코에 꼽힌 호스에 의지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아마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큰 고통이셨을 것 같다. 코로나에 세 번이나 감염되셨고 몇 차례 위중한 상황을 겨우 넘기는 일들을 겪는 동안 가족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매일 하루를 시작하며 그날이 오늘은 아니길 그렇게 바라 왔던 것 같다. 지난 10월 세 번째 코로나에 감염되신 후 폐렴으로까지 전이되어 상태가 매우 위중했던 시기 코로나 병동에서 어머니가 직접 외할아버지를 돌보시는 동안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전화를 드려 외할아버지 건강 상태를 확인했었는데 외할아버지 병세가 다시 호전되고 어머니도 제주도로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는 외할아버지 안부를 여쭙지 못했고 어머니도 외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가족들은 이미 많이 지쳐 있었고 마음속 깊은 곳의 여러 복잡한 감정들을 잠시만 덮어두자는 그런 암묵적 합의 같았다. 그로부터 한 달 두 달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새벽에 메시지가 오거나 어머니께 전화가 올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철렁했었고 꿈에서 이런 장면을 마주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확인한 외할아버지 소천 소식은 분명 꿈이 아니었지만 그전에 마주한 몇 번의 상황만큼 가슴이 철렁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를 더 붙잡아 두고 싶은 욕심이 그분께서 짊어지고 계신 고통의 크기 앞에서 무너져 내림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 외할머니 생신이셔’란 어머니의 말씀에 마주한 슬픔의 크기에 비할 순 없지만 아주 작은 위안을 얻었다. ‘생전에 외할머니께 그렇게 무뚝뚝하시더니 우리 외할아버지 사실 로맨티스트셨어’란 동생의 말에 언젠가 보내드려야 한다면 그날이 오늘이라 다행이다란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슬픔의 크기를 자꾸 줄여가며 난 그렇게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이다. 중국에 건너와 살게 되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지만 명절 때마다 꼭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 안부전화를 드렸었다. 내가 이십 대였던 시절 안부전화 땐 타국에서 지내고 있는 손자에 대한 걱정이 주 내용이었고 삼십 대를 거치면서는 중국이란 대국에서 튼튼히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나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사십 대 즈음에선 왜인지 나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었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 깨닫게 되는 날 그때의 일들을 다시 회상하는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는 게 인생이 아닌가 싶다. 내년 신정 때 즈음해서 외할아버지께 다시는 안부전화를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깊은 허전함이 찾아올 것 같다. 또 다른 명절이 찾아오고 또 찾아오고 그렇게 허전함이 점점 작아지고 결국 또 무뎌질 것이다. 유년 시절 가장 행복했던 외갓집의 추억을 선물해 주셨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많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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