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를 졸업한 뒤 2007년부터 UX 디자이너로 일해왔으니 올해로 경력이 만 9년이 되어가고 있다. 스타트업 이전 회사들이 에이전시와 벤처회사였고 같이 일하는 멤버나 클라이언트들이 대게 UX디자인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UX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부딪히는 사람들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보통 개발이 우선이다, 판매가 우선이다 정도의 한 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정도의 사람들이었다. UX 관련 분야에서 9년 가까이 일해 오면서 내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상식과도 같았던 것이 스타트업에서 많이 깨져버렸다. 이것은 나의 무지일 수도 있고 내가 몸 담았던 스타트업이 일반적이지 않아서 일 수도 있는데 내가 느꼈던 점은 스타트업에서는 UX 디자인의 접근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1. UX 디자인을 잘 알고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
UX 디자인 실무를 하거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UX 디자인을 설명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진 않다. 그래도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인 UX디자인과 관계된 실무자들이라면 왜 디자인을 할 때 사용자에 대해 연구를 해야 하고, 우리의 서비스에서 사용자가 느끼는 pain point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 고민을 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다. 더 내공이 많은 사람은 '어떻게'해야 하는 것 까지도 알고 있고 더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런데 내가 겪은 스타트업에서는 'UX'라는 단어를 잘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대표가 UX 디자이너인 나를 뽑은 이유는 주위 사람들이, 기사 같은데에서 보니 일명 잘 나가는 IT회사에서는 사용자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UX 디자이너가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뽑은 것이라고 하더라.
이런 점은 내가 속했던 스타트업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비슷한 사례가 꽤 자주 들리고 있다. 내 주위의 UX 디자이너에게 입사제의를 하는 스타트업 대표들의 말을 요약하면 "우리가 만드는 서비스의 사용자 경험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야 하는데 당신 같은 전문가가 꼭 필요합니다." 정도가 되는 것 같다. 잘못된 말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스타트업의 대표가 누구를 뽑을 때 왜 이 사람이 필요한지 어떻게 일을 수행하게 할지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이지 않고 남들이 그렇게 해서 따라 하는 사람이 꽤나 많다는 점이다. 모든 스타트업의 대표가 이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노련하고 경험도 풍부하고 똑똑한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도 최근 스타트업 붐이 일면서 창업자들의 수가 많아지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이 아닌가 싶다.
2. UX 디자이너는 사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스타트업의 대표들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UX 디자이너들에게도 문제가 있는데 이 점은 UX 종사자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Brunt의 남찬우 대표님의 세미나를 참석했었는데 Q&A 시간에 누군가 질문한 내용을 요약하면 '자신은 스타트업에서 UX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엔 사용자 경험이 별로 좋을 것 같지 않은 버전의 서비스를 회사에서 빨리 오픈하길 원한다. 이런 회사의 운영진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했었다. 남찬우 대표님의 대답은 '본인이 회사의 어느 위치에 있냐에 따라 다르다'였다. 참석자가 한 번 웃고 넘어가는 상황이었지만 질문의 대답에는 꽤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제공하는 서비스의 퀄리티에 대한 고집은 정말 좋은 태도라고 생각하지만 회사는 이윤을 내야 하고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스타트업이라면 이윤에 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Lean UX가 주목받고 있는데 스타트업일수록 정말 사용자면에서나 이윤적인 면에서나 Lean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또 개인적으로 UX 디자이너는 서비스 사용에 집중된 시각을 약간 넓힐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사용자와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회사 대표와의 대화도 중요하다. 대화를 통해 대표와 구성원들과 시각을 맞춰야 한다.
3.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때 다른 것보다 투자를 더 염두하는 경우가 많다.
스타트업은 보통 투자를 받아 수익이 발생할 때까지 버티거나 규모를 확장한다. 데모데이 같은 행사를 통해 국내외 투자회사를 이십여 곳 정도 만났었다. 투자 심사를 받을 때 받은 질문 중에는 현재 수익이 발생하는지, 매출액은 얼마인지, 손익분기점은 언제인지, 비즈니스 모델이 무엇인지와 같은 돈과 관련된 질문들이었다. 앞으로의 계획과 관련된 질문은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정말로 궁금했던 점은 시리즈 A도 못 받은, 사업을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회사가 수익을 내는 곳이 있나 궁금했다. 어떤 투자사(정확히는 투자 프로그램)에서는 우리는 실제 매출이 발생하고 있는 회사에게만 투자를 해준다고 했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모집 기준에 명시를 하던가..
어쨌든 스타트업에게 투자는 사막에 단비 같은 존재라 투자자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때부터 준비하고 있는 서비스의 사용자 입장에서의 고민과 투자자 입장에서의 고민이 함께 생기기 시작했고 판단하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UX 디자이너인데. 이것보단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하는 부분은 다른 부분 아닌가'하는 생각이 많아졌었고 대표에게 이와 같은 의견을 전달하면 내려지는 결정은 투자와 관련된 결정 또는 결국 대표가 하고 싶은 방향으로 결정이 되어졌다. 이 부분은 나의 역량 부족이 원인이기도 하다.
투자가 주요 이슈로 떠오르면서 회사에서는 투자를 받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지적재산권 업무가 생겨났고 재산권 유지를 위한 비용이 빠져나가기도 했다. 투자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서류를 만들기 위해 서비스 개발과는 상관없는 친인척 중 스펙이 좋은 사람이 개발 명단에 추가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하나하나 쌓이다 보니 서비스 개발에 집중해야 할 에너지가 다른 곳에 쓰여 내가 지금 뭘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연히 결과는 안 좋았고 악순환은 반복되었다.
"살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을 위한 방법을 취하면 실패하기 좋다. 신념을 갖고 나아가다 보면 돈은 따라오게 되어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그 말을 지키는 방법은 어렵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