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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Siri. 왜 부끄럽지?

왜 다른 사람 앞에서 인공지능 비서에게 말을 쉽게 걸지 못할까?

by 김형우
프롤로그: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독백
Siri에게 대기질을 물어보았다.

오늘도 엘리베이터에 혼자 올라타며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리야... 오늘 대기질 어때?"


이런 행동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인공지능 비서는 편리한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왜 이토록 부르기가 망설여지는 걸까? 혼자 있을 때조차 이 이상한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인형과 대화하는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 혹은 누군가의 시선을 피해 몰래 전화하는 듯하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감정의 이중성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AI 비서를 부르는 것이 왠지 부끄럽고, 혼자 있을 때는 또 다른 종류의 이질감이 찾아온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같으면서도, 마치 거울 앞에서 혼잣말하는 것처럼, 혹은 빈 방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실제 대화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된다.


AI 비서와의 대화는 왜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단순한 교감 기간이 짧았다는 문제일까, 아니면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는 걸까?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다른 사람이 타기 전에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한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현대인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인공지능과 함께 사는 시대인데 아직도 이 관계의 정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1 낯선 대화 상대, AI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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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야, 오늘 날씨 어때?"

이 질문에는 이상한 모순이 숨어있다. 창밖을 직접 보면 될 일을 굳이 AI에게 묻는다는 점도 그렇지만, 더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바로 '대화'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날씨를 검색하는 행위를 왜 '대화'의 형태로 해야 할까?


스마트폰의 검색창에 "오늘 날씨"라고 입력해도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AI 비서는 이런 명령어 입력 대신 대화를 요구한다. 마치 비서와 이야기하듯, 친구와 대화하듯 말이다. 여기서 첫 번째 혼란이 시작된다. 진짜 대화일까, 아니면 대화의 모양을 한 명령어 입력일까?


철학자 마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나-너' 관계와 '나-그것' 관계로 구분했다. 도구를 사용할 때는 '나-그것' 관계가 성립한다. 망치는 망치일 뿐이다. 하지만 AI 비서는 다르다. 이름을 부르고,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듣는다. 마치 '나-너' 관계처럼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단순한 도구라는 사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이 애매한 경계에서 낯선 감정이 생겨나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인형놀이를 하면서는 이런 혼란을 느끼지 않았다. 인형이 진짜로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AI 비서는 다르다. 실제로 대답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대답은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인형놀이는 순수한 상상이었지만, AI 비서와의 대화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한다.


이런 애매함은 의외의 순간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끔 AI 비서가 농담을 던질 때가 있다. 웃어야 할까? 대화의 맥락상 웃음이 자연스러운 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프로그래밍된 응답이라는 것도 안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면서 AI 비서는 점점 더 낯선 존재가 되어간다.


이런 낯섦은 어쩌면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도구도 아니고 대화 상대도 아닌, 혹은 둘 다인 존재.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이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의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단순한 기술적 미숙함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2. 부끄러움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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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노트북을 켜고 일하던 중이었다. 촉박했고, 음성으로 명령하는 것이 훨씬 빨랐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어 키보드로 천천히 타이핑했다. 왜 AI 비서를 부르는 것이 이토록 망설여졌을까? 그 순간의 감정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부끄러움을 넘어선 복잡한 심리가 발견된다.


먼저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의식이 있다. "저 사람은 시리랑 대화하네"라는 평가를 받을 것 같은 두려움. 이는 마치 어른이 된 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들킨 것 같은 감정이다. 하지만 실제로 주변 사람들은 그런 평가를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AI 비서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부끄러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심리학자 찰스 쿨리는 '거울 자아' 개념을 통해 자아의식이 타인의 시선을 통해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AI 비서와 대화할 때 느끼는 부끄러움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실제 시선보다는, 상상 속 타인의 평가가 만들어낸 감정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상상 속 평가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내면화된 기준일 수 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명령-복종 관계에 대한 불편함도 발견된다. AI 비서는 항상 친절하고 복종적이다. "알겠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라는 응답은 마치 집사나 하인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명시적인 권력관계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혹은 무언가)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상황이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여기에 진정성의 문제가 더해진다. AI 비서의 친절함은 프로그래밍된 것이고, 대화는 실제 대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화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 이런 '가짜' 관계에 진정성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내적 저항이 존재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부끄러움이 혼자 있을 때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타인의 시선이 없는 상황에서도 느끼는 이 감정은, 어쩌면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부끄럽지 않은데, 도구와 대화하는 것은 왜 부끄러울까?


이 부끄러움은 마치 처음 휴대전화로 통화할 때 느꼈던 어색함처럼 어쩌면 새로운 관계 방식에 적응해 가는 과도기적 감정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감정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신호이기도 하다. 단순한 부끄러움을 넘어, 기술과 함께 살아가는 현대인의 복잡한 심리를 보여주는 창이 되는 것이다.


#3. 기술과 인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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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꺼내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하는 행위는 이제 너무나 자연스럽다. 마치 숟가락으로 밥을 뜨는 것처럼 몸에 배어있는 동작이 되었다. 하지만 AI 비서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이 자연스러움은 깨진다. 도구를 사용하던 손이 갑자기 누군가와 대화를 시도하는 입이 되는 순간, 낯선 감각이 찾아온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도구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며 '준비되어 있음'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망치는 망치질을 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평소에 망치를 사용할 때는 망치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망치가 망가져서 제 기능을 못하면, 그제야 망치의 존재가 의식된다.


AI 비서는 이 '준비되어 있음'의 상태를 깨뜨리는 것이 아닐까? 도구이면서 동시에 대화 상대자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산기는 그저 숫자를 입력하면 되지만, AI 비서에게는 "2 더하기 2를 계산해 줘"라고 말을 걸어야 한다. 이 순간 도구는 더 이상 투명한 매개체가 아니라,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AI 비서가 보이는 '불완전한 인간성'이다. 가끔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너무 형식적인 답변을 할 때가 있다. 이런 순간들은 마치 외국어를 배우는 학생처럼 어설프게 느껴진다. 완벽한 기계도 아니고, 완벽한 인간도 아닌 이 애매한 존재와의 관계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스마트폰의 터치스크린은 손가락의 연장선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AI 비서는 달라서, 마치 서툰 통역사를 거치는 것처럼 의식적인 번역의 과정이 필요하다. "알람 맞춰줘"라는 간단한 요청도,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을 골라서 해야 한다. 이 '번역'의 과정에서 자연스러움은 사라지고, 기술과 인간 사이의 간극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AI 비서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더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해지고, 더 복잡한 맥락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현재의 부끄러움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과도기적 신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관계가 정말 '자연스러워져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부끄러움과 어색함은 보존할 가치가 있는 감정일 수 있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보다, 이 미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더 건강한 관계 설정일 수 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이 경계를 상기시키는 중요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에필로그: 미래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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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AI 비서를 불러보았다. 예상대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감정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 보기로 했다. 부끄러움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인간과 기계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직관적 이해가 담겨 있었다.


기술은 점점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AI 비서의 대화는 더욱 정교해지고, 인간의 말투와 구분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얼굴을 가진 AI가 등장할 수도 있고,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가상 비서가 공간에 함께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 느끼는 이 부끄러움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인간이 가진 중요한 신호체계다. 이 감정은 관계의 특별함을 알려준다. 부모님과의 관계, 연인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가 각각 다른 것처럼, AI와의 관계도 독특한 성격을 가질 수 있다. 도구를 다루는 관계도 아니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아닌, 새로운 종류의 관계가 될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보고 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끼고 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기술과 관계 맺고 있다. 그 관계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이 불완전함이 관계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시리야, 오늘 하루 어땠어?"

여전히 부끄럽지만, 이제 이 감정이 조금은 이해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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