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해링과 모네의 봄꽃 정원을 찾아서
피닉스를 오면서 딱 두 가지를 기대했던 것 같다. 멕시칸 푸드와 피닉스 미술관. 오랜만에 대도시 아닌 대도시 출장이라 미술관을 갈 마음에 신이 났다. 피닉스에는 아트 뮤지엄뿐만 아니라 애리조나 역사 뮤지엄, 네이티브 아메리칸 (인디언) 뮤지엄, 등 꽤 많은 각종 박물관이 다운타운 근처에 모여있는데 내게 언제나 그렇듯, 우선순위는 미술관이다. 숙소는 다운타운 피닉스이고, 회사 공장은 북서쪽으로 편도 50km쯤 떨어져 있는 거리라 출퇴근만으로도 녹초가 돼서 미술관에 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어느 날 하루 퇴근 후 피곤한 몸을 꾸역꾸역 이끌고 피닉스 미술관을 찾았다.
피닉스 미술관은 키스 해링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80년대 후반, 피닉스 아트 뮤지엄의 큐레이터였던 브루스 컬츠와 키스 해링과의 협업을 통해 1986년 피닉스 뮤지엄에서 열렸던 전시회의 마케팅 홍보물을 함께 만들었다. 해링은 피닉스에서 뮤랄 워크샵도 열었었고, 그 이후에도 그 둘의 관계가 이어져 컬츠는 피닉스 뮤지엄에서 키스 해링, 키스 해링이 동경하던 앤디 워홀, 디즈니가 함께하는 전시회를 기획했는데, 해링은 1991년 열리는 전시회를 보지 못하고 1990년 에이즈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전시의 준비의 흔적이 피닉스 미술관 안에 조그맣게 남아있다. 앤디 워홀을 동경하여 탄생한 (색이 입혀지지 않은 초본인 듯한) 해링의 앤디 마우스 스케치, 컬츠와 티셔츠 디자인에 대해 나눈 해링 발신의 편지, 그리고 그의 시그니쳐인 생동감이 넘치는 춤추는 사람들 그림까지. 코너에 작게 마련되어 있는 전시였지만, 해링의 스타일과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다가오는 공간이었다.
피닉스 미술관을 와야했던 이유. 모네의 Flowering Arch. 지베르니 정원에서 그린 봄의 꽃 아치 작품은 화사한 봄 그 자체였다. 모네의 후기 작에는 연하늘색이나 연보라색을 써서 차가운 기운을 풍기는 그림들이 많은데, 나는 그런 그림보단 이렇게 따뜻한 봄을 그린 모네의 그림이 정말 좋다. 이 그림 앞에는 특별히 벤치가 마련되어 있어서 미술관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르게 했다.
모네 그림 옆에 있던 피사로의 인상파 점묘화.
피카소도 하나 발견했다. 하얀 수건을 들고 목욕에서 나온 여인. 내가 익숙한 입체감을 강하게 표현한 피카소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몸 전체의 말도 안 되는 비율과 부드러운 선들이 조금 다른 느낌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왠지 귀여운 느낌을 줬다.
피카소 바로 옆에 있던 맘에 들었던 조각들. 여성의 라인은 참 아름다운 것 같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담당 궁정 여성 화가가 그린 루이 15세의 따님 초상화.
피닉스 미술관이 방문객을 맞이 하는 법. 멕시코 작가 카를로스 아모랄레스가 사랑했던 할머니와의 이별을 기억하며 만든 작품. 미술관을 입장하려면 꼭 지나야 하는 통로에 위치해 있다. 매년 캐나다에서 멕시코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모나크 나비의 대이동에 영감을 받아, 미술관 천장과 벽면을 25,000 마리의 검은 종이 나비로 뒤덮었다. 약간은 께름칙하지만 아름답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열심히 날아가는 생의 생동감을 준다. 생과 사, 이별과 기억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그려낸 멋진 설치물이었다.
아리조나의 지형적인 특성을 반영한 작품들도 아주 많았다. 붉은 협곡과 메마른 사막. 아리조나를 날씨 좋을 때 꼭 다시 와야만 하는 이유이다.
특히 사막의 메마른 대지에 시원한 비를 내려주는 것 같은 아래 사막의 비의 신 (Desert Rain God)이라는 그림의 대비감이 멋지게 다가왔다.
그 외에 아시안 전시관, 현대 미술관 등 볼거리가 많았지만 나의 주 관심사인 서양화동을 휘리릭 감상하고 미술관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Ta Carbon이 문을 닫기 전에 타코를 먹으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