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급은 사라지지 않는다

by BaGGom

오랜 시간 한국 기업 사회를 휩쓴 ‘직급 간소화’ 열풍은 오래된 관습을 깨는 혁신처럼 여겨졌다.

이제는 이 흐름에 동참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진 기업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직급 간소화로 무엇이 바뀌었을까?


문제의 본질은 단계 자체가 아니다.

사람이 모이면 조직이 생긴다.

조직이 생기면 역할과 책임의 차등은 필연적이다.

핵심은 한국에서 ‘직급’이 신분처럼 작동해온 방식과 사람들의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식 군대 조직, 유교적 상하 문화, 상명하복과 장유유서 관념이 결합된 결과,

직급은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되었고,

몇 년 차 부장이라는 타이틀은 마치 조직 내 생존을 증명하는 훈장처럼 여겨졌다.

젊고 유능한 인재의 성장을 가로막고, 조직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주범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이 직급 체계를 간소화했다.

껍질을 벗겨보면, 그 변화의 실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역할 중심’이라는 말은 매력적이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선임’, ‘책임’, ‘수석’ 같은 새로운 명칭이 이전 직급의 이름만 바꿔놓은 경우도 많다.

역할이란 것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거나, 정의되더라도 문서 속 개념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 권한과 책임, 눈에 보이지 않는 서열은 그대로인 경우가 다반사다.

진정한 역할 기반 체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직무 기반 체계가 어려운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역할은 고정된 틀에 가둘 수 없고, 업무와 환경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깔끔한 구분을 하려 한다.

이런 현실을 보면, 이름만 바뀌었을 뿐 실제로는 여전히 과거의 구조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특히 IT 업계를 중심으로 ‘레벨제’가 도입되었다.

네이버와 같은 기업들은 직급을 없애고, 역량과 기여도를 기준으로 여러 단계의 레벨을 부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는 연공서열에서 벗어나 보다 합리적인 성장 경로를 제시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하지만 갑자기 직급을 없애고 레벨을 만든다고, 기존에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직급이라는 인식까지 사라질까?


레벨 역시 본질적으로는 ‘계단’이다.

레벨제가 진정으로 과거와 달라지려면, 단순히 단계의 명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레벨의 부여 기준, 성장 경로, 평가 방식이 투명하게 공유되고, 모든 구성원이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원칙 아래 작동해야 한다. 그리고 레벨이 가리키는 것은 ‘높은 자리’가 아니라, 더 깊은 전문성, 더 넓은 책임, 더 큰 영향력을 향한 성숙의 여정이어야 한다.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그런데, 제도를 바꾼다고 갑자기 상황이 달라질까?

직급과 승진이 운영되던 방식, 더 근본적으로 직급과 승진을 경영 혹은 리더십 발휘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변화할까?


쉽지 않다.

아니 맞지 않는 것 일 수 있다.

결국 조직 내 위계와 그 위계의 사다리는, 리더가 질서를 유지하고 효율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여전히 중요한 도구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인 상황은 어쩌면 환상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오히려 단계가 많은 것이 나을 수 있다.

일부 불공정하다고 느끼거나 불합리한 상황도 생길 수 있지만, 단계가 적으면 한 번의 기회 손실이 너무 큰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글로벌 기업들도 정교하게 세분화된 위계를 운영한다.

물론 그들만의 사회문화적 배경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과거에 머물러있는것은 아니지 않나.

한국은 빠른 경제성장만큼 세대의 인식 변화도 빠르게 일어난다.

이제 사대과차부에 익숙한, 그 운영이 편한 세대보다 그렇지 않는 세대가 더 많지 않은가?

과거의 관습과 사고방식 만을 기준 삼아 “어차피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기보다, 변화하는 문화와 환경을 반영해 미래를 다시 그려보는 건 어떨까.


잘 설계된 단계는 오히려 구성원에게 강력한 동기와 목표를 준다.

각 단계는 전문성의 심화, 책임의 확장, 영향력의 확대를 의미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직급 없애기’가 아니다.
‘성장을 어떻게 정의하고, 그것을 조직 안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이다.

성장은 단지 조직도 위에 이름이 한 칸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전문성과 넓은 책임, 확장된 자율성을 포함하는 다차원적 여정이다.
그렇다면 조직은 이런 성장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떤 방식으로 인정하며,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직급제든, 레벨제든, 모든 시스템은 이 질문 앞에서 다시 해석될 필요가 있다.

단계는 있어도 좋다. 어쩌면, 있는 편이 더 인간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그 단계가 ‘직급’이든 ‘레벨’이든, 중요한 것은 그 의미와 작동 원리다.

매거진의 이전글나는 '주관적'으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