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는 객관의 옷을 입은 주관적 판단이다
이렇게 평가제도를 개선하면 평가의 객관성을 제고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평가 담당자라면 누구나 익숙할 것이다.
나 역시 평가 제도를 설계하며 ‘객관성’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사용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팀원을 평가할 때 정말 객관적일까?
타인을 향한 평가는 결국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 ‘어떤 틀’을 통과하면 갑자기 ‘객관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쉽사리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평가에서 ‘객관성’은 흔히 공정함의 증표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기업들은 기준을 세우고, 점수를 매기며, 절차를 다듬는다.
실제로 많은 기업이 오랜 시간 평가 제도를 개선하며 객관성을 확보하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런 노력만으로 사람의 해석과 판단이라는 평가의 본질을 온전히 담아내기는 어렵다.
같은 행동도 평가자의 기대나 해석에 따라 달리 평가된다.
같은 숫자라도 맥락과 비교 대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심지어 같은 평가자마저도 기분이나 조직 분위기에 따라 판단이 흔들린다.
결국 우리가 ‘객관적 평가’라고 부르는 것은, 정해진 답을 내는 공식이 아니다.
오히려 평가가 신뢰받도록 고안된 여러 장치와 형식의 집합체에 가깝다.
다시 말해, 객관성은
사람들이 “공정해 보인다”고 느끼게 만드는 설계 전략일 수 있다.
혹은 실현 가능하다고 믿는 몇몇 ‘통념’ 위에 세워진, 어딘가 불안정한 개념일 수도 있다.
통념 1. 숫자는 판단을 대신한다
조직은 숫자를 믿는다.
정량화된 지표는 분명해 보이고, 무엇보다 중립적이다.
숫자 앞에서는 해석이 개입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숫자는 맥락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매출이 10% 늘었다는 수치는 사실일 수 있지만, 그 수치가 전적으로 누구의 공이라 말하긴 어렵다.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말했듯, 숫자는 언제나 운, 환경, 구조의 영향을 함께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숫자가 잘한 결과인지, 그냥 그런 수준인지, 실망스러운 성과인지는
결국 사람의 해석이 따라붙는다.
숫자는 판단을 대신하지 않는다.
숫자는 판단의 입력값일 뿐이다.
통념 2. 정밀한 기준과 양식이 평가의 편차를 줄여줄 것이다
많은 조직은 평가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행동 기준을 더 구체화하고, 양식을 정교하게 설계하며, 체크리스트와 스케일을 표준화한다.
이렇게 하면 누구나 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같은 행동을 보더라도 어떤 사람은 “매우 우수하다”라 하고,
다른 사람은 “그 정도는 기본”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4점을 주고, 다른 누군가는 3점을 준다.
제도와 체계는 해석을 보완할 수 있을 뿐, 해석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정교한 양식은 판단을 더 투명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판단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기도 한다.
통념 3. 여럿이 합의하면 문제없다
많은 조직이 여러 평가자의 의견을 모으고 함께 논의해서 판단의 공정성을 높이려 한다.
이 구조는 겉보기에 합리적이다.
특정 개인의 편향이나 왜곡을 줄이고, 다수의 합의가 더 정확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합의는 종종 ‘진실’이 아니라
불만이 없는 판단, 즉 조직이 받아들일 만한 판단을 만드는 과정일 때가 많다.
권위 있는 사람의 의견이 중심이 되고,
소수 의견은 다수에 묻히며
가장 무난한 판단이 ‘정답’처럼 자리잡는다
합의는 평가의 안정성은 높이지만,
판단의 다양성과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통념 4. 동일한 기준이면 누구나 같은 평가를 내릴 것이다
조직은 평가 기준을 통일하고, 양식을 반복하고, 교육을 강화하면
결과도 자연스럽게 일관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같은 기준, 같은 문항, 같은 사람에 대한 평가라도
결과는 평가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피로한 날과 여유 있는 날,
조직이 위기일 때와 안정기일 때,
심지어 회의 분위기나 주변 동료의 퍼포먼스에 따라도 판단은 달라진다.
이것은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판단이 갖는 본질적인 유동성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구조로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주관적’이라는 말을 흔히 부정적으로 쓴다.
감정적인 평가, 편향된 판단, 들쭉날쭉한 기준.
이 모든 불신의 원인을 '주관성'이라는 단어로 묶곤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평가란 본질적으로 사람의 해석과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행동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떤 도구나 시스템이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의 업무는 숫자로 환원되기 어렵다.
리더십, 협업, 설득력, 창의성...
이 모든 역량은 맥락에 따라 달라지고, 결과가 아닌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주관성은 피할 수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드러나지 않고, 설명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주관성이다.
올바른 주관성이란 무엇인가?
· 감정이 아닌, 증거와 맥락에 기반한 해석
· 설명 가능하고, 반복 가능하며, 책임질 수 있는 판단
· 평가자의 성찰과 훈련을 통해 더 나아질 수 있는 능력이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주관적 판단이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여야 한다.
평가제도의 과제는,
익숙하고 안정감을 주는 객관성이라는 말을 위해 더 많은 수치와 절차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판단'이 드러나고, 책임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주관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리고 매번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감정이 아닌 증거와 맥락에 기반한 해석인지,
스스로에서 서렴할 수 있는지,
누구 앞에서도 책임질 수 있는 판단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