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조직에나 벽에는 좋은 말들이 걸려 있다.
‘고객 중심’, ‘창의와 도전’, ‘정직과 책임’.
많은 기업들은 '가치'를 심으려 애쓴다.
행동 규범을 만들고, 핵심가치 실천 여부를 평가도 한다.
때로는 진심으로, 때로는 관성적으로 반복되는 익숙한 풍경이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선언된 가치와 조직의 실제 움직임 사이에는 여전히 설명하기 힘든 간극이 존재한다.
마치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것처럼.
왜 이토록 많은 노력들이 그저 맴돌다 사라지는 것일까?
구성원들은 왜 회사가 내세우는 가치를 자신의 일과 무관하다고 느끼거나,
심지어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일까?
모든 회사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일종의 '보이지 않는 문법'이 있다.
이 문법은 대개 효율성을 추구하고, 예측 가능한 결과를 선호하며, 측정 가능한 지표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이라는 시스템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논리다.
문제는 일반적인 가치 – 신뢰 구축, 존중과 협력, 창의적인 실패의 용인, 완벽한 안전이나 품질 추구 등– 이 회사의 강력한 문법과 충돌한다는 점이다.
가치를 회사라는 시스템에 '연결'하려는 시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보이지 않는, 그러나 매우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효율성이라는 문법 : 회사는 본능적으로 더 빨리, 더 싸게, 더 많은 결과를 내도록 압박받는다.
이러한 압박감 속에서, 시간이 더 걸리거나 비용이 더 수반되는 행동(예: 충분한 토론을 거치는 의사결정, 완벽한 안전 점검을 위한 공정 지연 등)은 종종 후순위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측정 가능성이라는 문법 : 회사는 본질적으로 측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따라서 측정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가치(예: 주인의식)이나
결과로 바로 드러나지 않는 가치의 질적인 측면(예: 협업의 시너지 등)은
명확하게 숫자로 표현되는 정량적 지표(예: 개인별 매출, 생산량 증가 목표 달성률)에 의해 자연스럽게 중심에서 밀려난다.
또한 측정 가능성은 가치의 의미 자체를 자신의 논리에 맞게 '오염'시키기도 한다.
'고객 만족'이라는 풍부한 의미를 지닌 가치가 '클레임 건수 관리'나 단기 매출 증대를 위한 수단적 구호로 전락하기도 하고,
'창의적 혁신'이 '정해진 절차 안에서의 점진적 개선 활동 건수' 정도로 축소되기도 한다.
가치가 조직이라는 시스템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직이라는 시스템의 필요에 따라 가치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핵심가치가 힘을 잃는 것은 리더나 구성원의 의지 부족 때문 만은 아니다.
회사를 움직이는 강력한 논리가 가치와 전혀 다른 언어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실패한 시도들은 이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외면한 채 표면적인 접합만을 시도하기에,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우리는 그동안 가치를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많이 이야기해왔는지 모른다.
모든 좋은 것을 다 담으려 했고, 그것을 잘 설명하고 교육하면 이상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 기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힘은 '말'의 유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 '선택'의 무게에 있다.
회사가 수많은 갈등과 유혹 속에서, 다른 중요한 것들 – 때로는 눈앞의 이익, 단기적 효율성, 익숙한 편안함 – 을 기꺼이 '포기'하고서라도 반드시 지켜내고자 하는 단 하나의, 혹은 극소수의 비타협적인 원칙.
그것이야말로 자격이 있는 진짜 가치일 것이다.
핵심가치는 더 이상 조직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나열하는 아름다운 단어들의 목록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조직이 매 순간의 선택 앞에서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뒤로 미룰 것인지에 대한 희생과 결단을 요구하는 현실적인 기준이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만큼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기꺼이 포기할 것인가’ 이다.
이 질문에 대한 조직의 대답이, 바로 새로운 가치 설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1. 덜어낼수록, 선명해진다
모든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쓸모가 없다.
좋은 말들을 나열하는 대신 조직의 생존과 정체성 그리고 장기적인 성공에 필수적인,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혹은 극소수의 가치를 식별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가치가 단순히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넘어, 그것이 '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며,
현실의 복잡한 선택 앞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명확히 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기꺼이 감수해야 할 '희생'과 '트레이드오프'의 무게를 조직 전체가 명확히인지하고 공유하는 것이 핵심이다.
통신 회사가 '고객 데이터 프라이버시 및 보안'을 핵심 원칙으로 천명한다면, 이는 새로운 기술 도입의 속도나 데이터 기반의 사업 확장, 단기적 운영 편의성 등 다른 중요한 경영 목표들보다 고객의 프라이버시와 데이터 보안이 항상 우선한다는 의미이다. 서비스 개발 과정에서 프라이버시 침해 위험이 있다면 출시를 지연시키고, 데이터 활용을 통한 단기 수익 증대 기회를 포기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며, 이를 위한 보안 투자 비용 증가나 업무 비효율성 발생을 감수하겠다는 명확한 선택과 집중의 선언이다.
2. 깊숙이, 어떻게든 새겨라
핵심가치가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단순히 몇 가지 규정, 제도를 추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가치가 조직이라는 시스템 운영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시스템의 ‘기본값(Default Setting)’이자 필수 전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항공사에서 '안전 운항'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항공기 정비 완료 승인 및 안전 점검 데이터가 운항 관리 시스템과 실시간으로 연동되어, 최소 장비 목록(MEL) 기준을 포함한 모든 안전 요건이 100% 충족되지 않으면 해당 항공편의 운항 계획 수립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시스템적으로 차단한다거나 기장에게 안전과 관련하여 최종적인 운항 중단 또는 회항 결정 권한을 부여하고, 그 결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운영 상의 불이익(비용, 시간)으로부터 기장을 보호하는 정책을 명문화하는 등 Embedding이 필요하다.
3. 핵심에서 시작하여 전체로 퍼뜨려라
이 비타협적인 핵심가치를 회사 내 모든 시스템, 모든 업무 영역에 동일한 강도와 방식으로 억지로 적용하려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가치의 힘이 강하게 발휘되어야 하고,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핵심적인 업무 프로세스와 의사결정 지점에 자원과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핵심 영역에서의 흔들림 없는 원칙 실행은 단순한 시스템 변화를 넘어, 회사 전체에 강력하고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즉, 가장 중요한 중심축을 제대로 바로 세우면, 그 힘과 정신이 조직 전체로 자연스럽게 파급되어 나간다.
핵심가치가 현실에서 살아 숨 쉬기 위한 마지막 관문은 결국 리더십에 달려있다.
리더는 단순히 가치를 선포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성과 압박과 시장의 변덕 속에서 "이번 한 번쯤은 괜찮겠지" 하는 타협의 유혹을 가장 직접적으로 마주하며, 때로는 그 원칙을 가장 먼저 무너뜨릴 수 있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
진짜 리더는 가치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치가 흔들릴 때 그것을 지켜내는 사람이다.
원칙이 시스템과 충돌할 때, 시스템이 현실을 따라가려 할 때, 그 흐름을 다시 원칙으로 조율하는 사람.
리더는 말보다, 선택으로 말해야 한다.
지금이, 가장 빠른 때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핵심가치를 정성스럽게 '만들고', 그것을 조직 구성원들에게 '전파하며', 어떻게든 '내재화'시키려 애써왔다.
하지만 진정한 핵심가치는 언어의 정교함이나 선언의 빈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핵심은, 처음부터 다른 곳에 있었을 수 있다.
지금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핵심가치를 그대로 둔다고 당장 큰 일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나?
비타협적인 원칙을 찾아내고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내부의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시스템 그 자체에 깊이 새겨 넣는다면
우리 회사가 얼마나 단단하고, 예측 가능하며, 깊은 신뢰를 얻게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