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업무가 뭐지?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사람인 사이트를 무슨 주식 호가창 보듯 쳐다봤었다. 짧은 시간에 큰 변화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지원서를 작성하진 않았다. 그러나 하반기 공채 서류 광탈 후, 사람인을 아니 볼 수 없었다. 똥오줌 가릴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는 경제학과였다. 하물며 지방대. 공대생이었던 나는 군대 전역 후 자아를 찾아 경제학과로 전과했었다. 취업은 공대라는 사실은 저 멀리 남겨두고.
취업 전선 앞에 서 있으니 그때 호기롭게 자아를 찾아 나섰던 '그 자아'를 붙잡아 한대 줘 패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사람인을 다시 쳐다보았다. "검색어를 입력해주세요"라는 검색창 앞에선 쓸 말이 없었다. "지역", 지구 끝까지라도 가겠습니다. 문제는 "직업(직종)"이었다. 경제학과 출신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분야는 금융인데, 하.. 최고의 직장 아닌가, 시간을 투자해도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패스. 다음으로 마케팅, 회계, 홍보, 법무. 아는 것이 없었다. 하,, 지금 생각해도 답답하기 그지없다.
내가 검색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가 남았다. 기획
영혼 나간 동태 눈깔로 사람인을 보던 중, 동태 눈깔을 사슴 눈망울로 만들만한 채용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채용분야: 경영기획(1명), 전공: 상경계열. 그 회사는 민자고속도로 운영회사였다.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하고 연봉도 마음에 들었다. 손가락은 이미 ‘지원하기’를 클릭했다. 단숨에 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이미 몇 가지 버전의 자기소개서, 입사동기가 있었기 때문에 금방 작성할 수 있었다. 며칠 후 서류합격 발표가 났다. 그리고 1차 면접+필기시험 →2차 면접+필기시험을 거친 후 최종 합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뽑혔을까 싶다. 학벌도 경력도 나보다 좋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여하튼 운 좋게 합격하고 지금 입사 6년 차 대리가 되었다.
기획업무가 뭐지?
사실 기획업무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입사했다. 예산? 사업계획? 이런 연관 검색어만 막연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재벌 자식들이 기획실장으로 발령 나긴 하던데, 중요한 집단인가?
입사 후에도 기획업무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재무모델, 협약서, 법, 사업현황, 실적 분석 보고서, 사업계획서 등을 공부하고 주어진 업무들을 처리했다. 예산을 편성하고 정부, 이사회, 주주, 대주단에서 요구하는 자료를 작성하였으며, 왜 그리 많은지 이해할 수 없었던 평가와 점검들을 준비하고 실적을 관리하며 순간순간 일어나는 문제들의 해결책을 고민했다. 이러한 업무를 하면서도 '기획업무가 뭐지?'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냥 하고 있는 업무들을 나열할 뿐.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역할이 문득 한 문장으로 정리되었다.
'사장님 따까리'
너무 천박한가? 유식하게 바꿔보자.
세상에 O or X로 결정되는 사안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사실 그렇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잘 없다. 이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돈도 사람도 무한하다면 의사결정이 왜 필요하겠는가? 한정된 자원 안에서 기획팀은 대내적, 대외적 이해관계를 파악하여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한다. 기획팀은 이렇게 결정한 최적의 안을 가지고 의사결정권자에게 보고한다. 필요하다면 이사회, 주주총회까지 거치게 된다. 만약 이 안이 채택된다면, 이는 회사의 공식입장이 된다. 그리고 그 결정이 좋은 결정이었는지 끊임없이 관리해 나가야 한다. 더불어 회사가 가진 역량과 대외적 환경을 주시하며,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파악하고 대비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이 기획팀의 주요 업무인데 요약하면 '경영진의 합리적 의사결정을 위해 수행하는 업무'라고 할 수 있다.
기획분야도 다양하다. 제품 기획, 연구기획, 마케팅 기획. 식견이 얕아 그 모든 기획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진 못하지만, 수많은 대안을 검토하여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에는 다름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작성할 글들은 내 후임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었는데, 경영기획, 전략기획 분야에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거나 면접을 준비할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글을 작성해 보려 한다. 남들 다 아는 그러한 회사가 아니라 다소 민망함에도 불구하고, '나'부랭이가 몸으로 때우는 것을 제외하고 이빨 털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일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소개 정도라 생각해 과감하게 키보드를 휘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