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항아리가 가르쳐준 것
얼마 전 팀 워크숍을 했다. 점심 무렵 용산 근처에서 만나 베이글을 먹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사유의 방에 들러 반가사유상 두 작품을 보았다. 반가사유상은 앞에서는 분명 장난스레 미소 짓고 있었는데 옆에서 보니 진지하게 생각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사유(思惟)’하다의 뜻을 찾아보니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냥 생각만 하는 게 아니었다. 두루, 깊이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유하며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가 반가사유상의 표정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반가사유상에서 받은 여운을 뒤로하고 곧바로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달항아리였다. 우리 팀의 선배는 매년 이곳에 특정 달항아리를 보러 온다고 했다. 그렇게 이곳에 있는 많은 백자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다는 달항아리를 만났다. 조선 1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 달항아리의 외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좌우가 확연하게 비대칭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내가 봐왔던 달항아리와는 사뭇 달랐다.
설명 글을 보니 달항아리는 반원형 몸체를 위아래로 이어 붙여서 만들기에 몸체 가운데 접합 흔적은 문질러서 지우지만, 살짝 일그러진 모양은 내버려둔다고 한다. 그래서 저절로 자연이 이루어진 듯한 멋이 살아났다고 적혀 있었다. 또 좌우 대칭이 어긋난 것을 두고 “넉넉한 모양새와 수더분한 흰 빛깔이 어딘지 사람의 냄새를 풍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미감이 조선 후기 백자의 조형성을 대표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글을 읽는데 뭔가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 와장창 깨지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나는 늘 나에게서 모자란 것을 찾아 그 구멍을 메우고 있었다. ‘육각형 인재’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부족한 곳을 채우고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집 밖에 나설 때 다시 돌아와 양발을 바꿔 신기도 했다.
그런데 이 도자기를 보고서 완벽이란 가치가 내게서 스르륵 허물어졌다. 완벽은 좌우대칭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일관된 걸 가리키는 것도 아니었다. ‘결함 없이 완전하다’는 건 불가능한 욕망이었다. 오히려 결함이라고 여겼던 부분은 고유한 매력으로, 넉넉한 마음새로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완벽한 사람보다는 넉넉한 사람이 되어보자’고 달항아리가 내게 조언을 건네주는 것 같았다. 달항아리의 넉넉한 품성과 편안한 미감을 닮고 싶다. 우선 이 달항아리가 건네준 온기를 마음 가득 품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