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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밍 Dec 14. 2022

받아쓰기는 부끄러워요.

"오늘은 우리 마음을 말해볼 거예요. 슬퍼요, 기뻐요, 화나요......" 


감정 표현을 배우는 시간이다. 에린이 한국어 교실에서 빠지니 수다쟁이가 없어서 그런지 조금 활력을 잃었다. 감정 표현을 학습하면서 간단한 활동을 준비했다. 


아이들이 알고 있는 슬퍼요, 기뻐요 등의 표현 외에 학교 생활에서 자주 생길 수 있는 마음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3가지의 다른 표현을 알아보고 어떤 상황에서 그런 마음이 생기는지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속상해요, 부끄러워요, 행복해요. 


아이들이 알고 있는 슬퍼요, 기뻐요, 좋아요 보다는 조금 세심한 표현이라고 할까? 종종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지만, 알고 있는 단어가 한정되어 있어 좋아요, 싫어요, 슬퍼요, 사랑해요만 말하곤 한다. 


"막심은 언제 속상해요?" 

"친구와 싸웠어요. 집에 왔는데 계속 머리에 친구 있어요. 속상해요."

계속 머리에 친구가 있다고 한 표현이 너무 귀엽다. 

"그렇구나. 친구와 싸우고 집에 갔는데, 계속 친구 생각이 났구나."

"네, 맞아요."


"정원이는 언제 부끄러워요?" 

"음...... 받아쓰기가 부끄러워요." 

"응? 받아쓰기가 왜 부끄러워요?" 


받아쓰기가 부끄럽다니? 

정원은 막심 쪽을 살짝 보면서 이야기해도 되나... 하는 눈빛으로 다시 날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얘기해 봐요."

"음... 받아쓰기 시험 봤어요. 나는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이렇게 치팅했어요(살짝 책상 밑을 보는 시늉 - 정원은 영어에 능숙하다). 그런데 친구가 나를 봐요. 선생님한테 말했어요. 선생님은 나를 혼냈어요. 너무 부끄러워요."  


'부끄러워요'라는 단어에 너무 적절한 경험을 용기 있게 말해 준 정원. 정원에게는 이 기억이 아마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 같다. 




한국의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2학기가 되면 받아쓰기를 시작한다. 학교에서 1급부터 십몇 급까지의 수준을 정해서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나 문장들로 한 급수당 열 문제를 만든다. 처음에는 우리, 나비, 바지 등 받침이 없는 쉬운 단어부터 시작하지만 급수가 올라갈수록 쌍자음과 겹받침이 나오고, 조사가 들어간 완벽한 문장과 문장부호들이 제시된다. 이 받아쓰기 급수표는 1학년 아이들이 2학기 내내 가지고 다니며 1주일에 한 번씩 시험을 본다. 


사실, 저학년 중도입국 아이들에게 이 받아쓰기는 큰 스트레스이다. 한글을 읽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어도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며, 특히 아이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어의 뜻을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어교실 저학년 학생 중 가장 수준이 미흡했던 에린의 한글 읽기가 어느 정도 완성된 날, 이제부터 수업 끝나기 전에 받아쓰기 시험을 보겠다고 예고했다. 막심과 정원, 에린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안된다고, 받아쓰기 못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받아쓰기가 계속될수록 아이들이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은 칠판에 나와 차례로 서서 칸을 나누고 직접 자신의 이름을 쓴 뒤 칠판에 받아쓰기 시험을 봤다(아이들은 이 방식을 제일 좋아했다). 어느 날은 깍두기공책에 시험을 봤고, 조금 어려운 단어나 문장을 배운 날은 단어 카드를 책상 위에 놓고 한 번씩 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기도 했다. 그날 배운 단어들의 의미를 이해한 뒤 바로 보는 받아쓰기 시험은 아이들에게는 시험이라고 인식되기보다 일종의 마무리 게임 같은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아이들은 첫날만 싫다고 손사래를 쳤을 뿐,  내가 "받아쓰기 준비하세요~!"라고 말하면 "와~!"라고 환호성을 질렀고, 시간이 부족해 받아쓰기를 못하는 날에는 "오늘은 받아쓰기 없어요? 에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셋 중 한글 수준이 가장 높은 막심은 집에서도 받아쓰기 급수표를 열심히 공부해서 원학급에서 받아쓰기 100점을 맞았다고 종종 자랑을 하곤 했다. 


아이들이 시험을 좋아하다니. 

더불어 정원에게도 더 이상 받아쓰기가 부끄럽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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