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03 라스베가스 고든 램지 헬스키친 방문기
라스베가스에 왔다.
사치스런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도시다.
그 명색에 걸맞게 고급 호텔과 고급 식당이 즐비하다.
따라서 지나친 구두쇠인 나로서는 이 도시를 온전히 즐길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허기가 생길 때마다 내가 구글 맵에 찾는 식당의 조건은 $$$나 $$를 배재한 $ 한개짜리 식당들 뿐, 따라서 한 끼 식사는 무조건 10$~20$ 안쪽에서 지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만큼은 사치를 부려야겠다 싶은 식당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고든 램지의 헬스 키친.
미국의 백종원 정도 위상이라 생각하면 될까? 이 영국의 사업가는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셰프이고, 식문화로서는 다소 고립되어 있는 한국에서까지 그 유명세를 구가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음식 영상이나, 그 유명한 욕설 영상들을 볼 때마다, 저런 최강자의 요리를 한 번 맛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라스베가스에 왔으니 큰 돈을 들여서라도 헬스 키친에 방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방문기는 음식 위주로 적을 것이기에 다른 설명은 최소화하겠다.
식당은 굉장히 캐쥬얼한 느낌이며, 고급의 느낌은 아니다.
또 규모과 질은 반비례한다고 했던가? 식당이 굉장히 크고 스태프도 매우 많기 때문에 적절한 수준의 퀄리티가 보장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가격은 코스 메뉴 기준 세금 포함 100불 정도가 소모되므로 굉장히 비싼 편이다. (내가 지금껏 먹어본 그 어떤 식사보다 비쌌다)
인테리어나 내부 구조는 서울에 위치한 고든 램지 버거와 비슷한 느낌이 있다.
특이사항으로는 유리로 된 입구를 들어가면 스크린에서 2D 고든 램지가 환영해주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진짜 고든 램지가 있는 것 같다. 입장 시부터 고객을 속이고 들어가는건데, 후술하겠지만 이들의 음식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나는 89.95달러짜리 쓰리 코스 '팬 시어링 관자-비프 웰링턴-끈적한 토피푸딩'을 골랐다.
먼저 에피타이저였던 팬 시어링 관자는 무척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자 요리가 다소 고급 이미지이기도 하고 해서 나는 관자를 많이 먹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자 요리는 정말 비렸다. 고든 램지가 유튜브 영상에서 하도 스캘롭 스캘롭 하는게 생각나서, 아 최고급 요리사의 식당에선 관자를 어떻게 요리할까 한껏 기대에 부풀었는데, 정말 별로였다. 식감은 겨우 질기지 않은 선이었고 관자의 크기는 작았으며 한입만 베어물어도 입안 가득 채우는 비린맛은 모든 음식을 망쳤다. 곁들여 나온 소스의 경우 녹색 퓨레는 꽤 괜찮은 궁합을 자랑했으나 갈색 글레이즈드는 대체 왜 있는지 모르겠을 정도였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설탕이 조금 들어가고 관자의 관련 부위를 이용해서 해산물 향을 조금 낸 듯한데, 이 글레이즈드의 가장 핵심 포인트는 살짝 태울 때까지 졸여 탄 향의 아찔함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 탄 향은 플레이트 전체를 지배해서, 얘네들이 비린 관자향을 덮을려고 더 큰 녀석을 데려왔나 싶을 정도였다. 입을 헹궈주는 잎채소가 아니었다면 정말 다 못 먹을 뻔했다. 플레이팅도 초라하고... 그냥 전반적으로 근 먹어본 음식 중 최악이었다. 먹다가 이거 원래 음식맛이 이런거 맞나. 뭐 인종차별같은거 아니야? 싶은 생각이 들 정도.
메인은 내가 여기 온 이유와도 같았던 비프 웰링턴. 손이 워낙 많이 가는 요리기 때문에 인건비를 상당히 필요로 하고, 따라서 음식 가격은 훨씬 올라가게 되어 있으므로 오직 그 유명세와 상징성으로만 팔아먹을 수 있는 요리다.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소고기 안심에 버섯 뒥셀을 바른 뒤 펍 패스츄리로 뒤덮은 이 요리는, 유명 양식 셰프들의 유튜브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요리이다. 버섯 뒥셀이라는 것 자체가 흔하지 않고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며 펍 패스츄리가 무엇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한국과는 거리가 있는 음식이다. 이 음식은 영국에서 유래된 요리답게 고든 램지의 시그니쳐이고 따라서 그의 레스토랑에서 먹기를 고대해 왔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영접하게 되었다.
크기는 굉장히 작다. 더 웃긴건 이게 디너 코스 메뉴나 올데이 코스 메뉴나 이렇게 나오는거지 10~20불이 더 싼 런치 코스메뉴에서는 저 조그만한게 한쪽만 나온다. 분쟁을 피하고자 런치 코스에선 'Petite beef wellington'이라고 해놨다. 그래도 정작 먹으면 생각보다 오래 먹게 되는데, 이건 양이 많아서라기보단 비프 웰링턴의 특이한 구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비프 웰링턴은 만들기만 어려운게 아니라 먹기도 쉽지 않은데, 안그래도 잘 썰리지 않는 두툼한 스테이크에 펍 패스츄리와 뒥셀까지 겹겹이 있기 때문에 모양을 유지하면서 먹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먹다보면 빵은 다 펼쳐지고 뒥셀은 사방팔방 흩어지고 아주 난리가 난다.
맛평가를 해보면, 우선 기본적으로는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무엇보다 고기 표면 자체를 팬에 직접 시어링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마이야르가 극대화되지 않는다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헬스 키친만의 문제라기보단 비프 웰링턴의 근본적인 문제였다. 또 여기에 사용된 안심은 충분히 부드러웠으나 그럼에도 아주 좋은 질의 고기는 아니었던 듯싶다. 같은 돈 낸다고 쳤을 때 한국의 고급 소고기구이 집에서 궈먹는 한우가 훨씬 맛잇겠다 싶었다.
뒥셀은 집에서 혼자 몇번 만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식당의 맛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중후한 버섯 맛이었다. 펍 패스츄리도 처음 먹어봤는데 특별히 쫄깃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고 존재감 없는 밀가루 스킨에 가까웠다. 따라서 고기의 마이야르를 포기하면서까지 이 밀가루 표피를 덮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곁들여 나온 것은 매쉬드 포테이토, 레드와인 데미그라스 소스, 작은 입가심용 뿌리채소였는데, 특별한 것은 없었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당근이었다. 어떻게 요리한 것인지는 몰라도 당근이 상당히 부드러웠고 그 은은한 단맛이 잘 살아났다. 이 레스토랑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은걸 꼽으라면 이 당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리해보면 내 인생 첫 비프 웰링턴은 정석에 가깝게 조리되었으나 예쁜 플레이팅을 위해 맛을 포함해 만드는 노력이나 먹는 이의 수고스러움까지 포함하여 많은 것을 희생한 요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instaworthy한 음식이 맞고 맛에 크게 집중하지 않는 이들이라면 행사용 요리로 적절하지만, 미식을 추구하는 이들이 비싼 돈 들여가며 먹을 맛은 분명히 아니다. 기회가 된다면 영국 본토에서 한번만 더 먹어보고 그 맛을 비교해보고 싶다.
결국 전채와 메인을 먹었을 때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웠고 디저트만 남았다. 디저트는 'Sticky Toffe Pudding'이라는 영국의 전통적인 디저트였다. 이름부터가 우리들에겐 낯선지라 구글링해봤는데, 견과류가 들어간 디저트였다. 그리고 이 디저트는.. 꽤 맛있었다. 언젠가 한 셰프가 말하길 코스 요리를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한건 디저트라고 하는 것을 들은 적 있다. 결국 마지막 임팩트가 그 레스토랑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저트의 경우, 단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디저트가 딱 그랬다. 다만 문제는 그 단맛이 지나치게 미국 입맛에 맞춰진, 폭력적인 단맛이었다는 점이다. 절반 정도를 먹은 이후부턴 너무 물려서 한술 한술 뜨기가 꺼려졌다. 맛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는데, 말은 푸딩이지만 케이크에 가깝고 질감이나 단단한 정도는 티라미수가 바스라지는 느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견과류들이 지나치게 단 맛을 조금이나마 중화해주는 편이며 무엇보다 위에 올라간 아이스크림과의 조화가 매우 환상적이다. 이 아이스크림은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양이 지극히 적어 한술 한술 뜨기가 너무 아까웠다. 가능하다면 한국에서 투게더를 가져오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 아이스크림이 없으면 맛의 배리에이션이 너무 떨어져서 케익의 단맛을 지워줄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 달았다는 문제가 있었음에도 이 디저트가 그나마 코스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한국에 가서 만들어볼 생각이 있다. 설탕은 조금만 넣고 말이다..
만족스러웠던 디저트가 점수를 조금 만회하긴 했어도 심각했던 전채와 아쉬웠던 메인이 싸지른 똥을 치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계산서에 적힌 '세금 포함 100달러'를 봤을 때, 나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