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에 대한 재평가와 그를 통해 바라본 인간 코브의 구원
생각은 생각 자신을 생각하기 위한 것으로 변모할 수 있으므로, 회의주의로 변모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생각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는 것이다. (쇠렌 키에르케고르, <철학적 단편 후기>)
마일즈 모랄레스: 제가 준비되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죠?
피터 B. 파커: 알 수 없어. 그냥 믿어 보는거야(It's a leap of faith). 그거면 돼. 믿음(A leap of faith).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中)
<인셉션>은 그 흥미로운 구조만 놓고 보더라도 충분히 좋은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 안에 담긴 내적 함의역시 빼어난 가치를 지닌다. 그중에서도 제일인 것은 Leap of faith에 관한 내용이다.
<인셉션>은 기본적으로 귀향 서사이다. <오디세이아>를 필두로 오랜 역사 안에서 인류는 귀향에 관한 서사를 만들어왔다. 한때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유행어가 있었는데, 더군다나 코브는 집을 자발적으로 나간 것도 아니고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 그 심정이 어찌 참담했겠는가. '귀향' 테마에 대해서는 다른 영화들과 엮어서 이야기해볼 상황이 추후에 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코브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귀향을 어떻게 이룩해낼 것인가? 그 답은 Leap of faith에 있다.
코브: 제가 만약 이 일을 한다면, 아니,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면, 보장이 필요해요. 당신이 절 도와준다는 걸 어떻게 알죠?
사이토: 알 수 없네. 하지만 난 알지. 그래서, 믿음의 도약을 한번 해볼텐가? 혹은 노인이 돼서, 후회에 가득 차, 외로운 죽음만을 기다릴 텐가?
Cobb: If I were to do this, if I even could do it, I'd need a guarantee. How do I know you can deliver?
Saito: You don't. But I can. So, do you want to take a leap of faith? Or become an old man, filled with regret, waiting to die alone?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믿음의 도약'의 대립항으로 설정된 것이 '후회에 가득 찬 채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으로 설정된 것이다. '믿음'의 반대가 '믿지 않음'이 아닌, '후회'로 논의되고 있는 이 장면은 무언가 섬뜩한 구석이 있다. 신앙을 버린 인간에겐 회의주의만이 남을 뿐이라는 걸까? 물론 이러한 논의 방식에 기분이 썩 달갑지 않은 이들도 많을 것이다. 우선 무교인 나부터도 살짝 그렇다. 하지만 신앙을 버린 인간이 회의주의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할 순 없다. 그리고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은 신앙과 회의주의의 양자택일적 노선을 결말부에 이르러 통합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논의해 보도록 하자.
다시 저 대화문으로 돌아가면, 이 장면에서 결국 사이토의 제안을 승낙한 코브는 언뜻 봤을 때 마치 사이토의 말재간에 놀아난 양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그렇지 않다. 귀향을 시도하고자 코볼 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코브는, 임무 실패로 인해 집에 못 돌아가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목숨까지 위협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사이토가 제안한 도박수는 유일한 동아줄이었고, 따라서 '기댓값이 높은 합리적 제안'은 아닐지언정, '차악이지만 상대적으로는 합리적인 제안' 정도는 됐다. 사이토의 제안을 승낙한 이후 사이토가 코브에게 '보다 현명하게 팀을 꾸려라'라고 했을 때, 코브가 일면식 없는 아리아드네를 채용하는 과감한 모습이나, 케냐에서 임스를 만나러 갔을 때 그가 도박판을 벌이고 있는 장면 등으로부터 코브의 임무 승낙이 '배수의 진을 친 도박수' 였음을 영화는 다시 상기시킨다.
또한 사이토가 요구한 인셉션이라는 임무는, 맬을 향한 자신의 정신적 불안을 얼마나 제어하느냐가 주된 성공의 관건이 되었기에, 외적 요인에 휘둘리기는 임무라기보단 자신에 의해 제어되는 임무였다. 코볼 사에 잡혀서 죽건, 후회에 차 늙어서 죽건, 죽기 직전 사이토의 제안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갈 것인데 차라리 인셉션을 실패해서 자멸해 죽는 편이 그나마 낫지 않겠느냐는 코브의 결단이었다.
이제는 사이토의 관점에서 보자. 이 영화는 사이토의 내면에 대해 깊은 성찰을 다루지 않는다. 그저, '조금 적극적인 고용인' 정도로 그려져 분량도 적다. 후반부 3단계 꿈 설옹성에서 밀려 들어오는 적들에게 수류탄 한 방을 맥인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꿈속에서의 사이토는 짐덩이나 다름없다. 애초에 팀에 포함되지 않는 인물이었는데 자신의 고집으로 팀에 포함되었고, 1단계 꿈에서 몸을 간수하지 못해 총에 맞으며 이후 프로젝트 진행에 큰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사이토를 재평가하고자 한다. 그는 그의 가장 크고도 유일해보이는 능력치—재력—을 제하고서라도 정신적으로 매우 강인한 사람이다. 영화 시작부 코브의 접근을 역이용하여 그의 능력을 테스트해보고, 총구로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카페트가 양모가 아님을 눈치챔으로써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상기한 저 대화문에서, leap of faith를 행하는 것은 코브뿐만 아니라 사이토 자신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대로 코브의 경우 사이토의 제안을 승낙하는 것은 유일한 선택지였기 때문에 용감한 결단이었는지 묻는다면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그 도박수의 결단 역시도 일종의 도약이긴 하겠으나 그저 얕은 도약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이토의 경우는 다르다. 경쟁사에 의해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몽땅 잃어버릴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그에게도 역시 실력자 코브를 채용하는 것이 간절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너가 승낙하지 않으면 뭐 어쩔 수 없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간절함을 그대로 내비치기보단, '신뢰의 도약을 하겠냐는' 물음을 도발적으로 내비치는 사이토는 고도의 연기력과 절제력을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특히나 신뢰의 도약의 대립항으로 설정된 '후회에 가득 차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의 경우, 자신이 평소 '신뢰의 도약'에 대해 성찰해보지 않았다면 결코 튀어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코볼 사에게 제압당해 기업이 패망하고 후회에 가득 찬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한 사이토는 역설적으로 그 두려움 가득한 자기물움을 코브에게 던짐으로써 결국 자기구원을 얻는다.
사이토의 제안과 코브의 승낙 이후로 벌어지는 전개들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의 연속이다. 하지만 오늘의 경우 그 많은 내용들을 차치하고, 'leap of faith'의 물음에만 집중하려 한다. 영화 내내 코브를 괴롭히는 맬 트라우마에선 이런 대사가 나온다.
당신은 기차를 기다리고 있어. 당신을 아주 멀리 데려갈 기차. 당신은 이 기차가 당신이 원하는 어디로든지 데려가 줄 것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정확하게 어딘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상관없어. 왜냐면 우리가 함께일 테니까.
You are wating for a train. A train that will take you far away. You know where you hope this train will take you, but you don't know for sure. But it doesn't matter. Because we will be together.
코브는 이미 죽음의 결단을 내려본 적이 있었다. 물론 이 세계가 꿈이란 것을 철저히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내린 결단이기 때문에, 그것이 과연 얼마나 용감했는지는 의문부호가 달린다. 심지어 죽음을 택한 방식도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 가만히 누워 들어오는 기차에 깔려죽길 기다리는, 매우 수동적인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면한 세계의 피상성을 거부하고, 진짜 세계를 향해 귀환하고자 한 그의 용기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있다. 위의 문구에서 드러나듯, 그가 용기내어 죽음의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첫째가 그것이 거짓 세계임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둘째로는 '애인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동행자가 있는 결단은 비교적 용기내기가 쉽다. 가평에서 번지 점프를 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데, 첫번째 번지를 자처한 내가 겁에 잔뜻 질린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점프대에서 발을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은, 뒤에서 지켜보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혼자였다면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인셉션 임무를 수행하는 코브는 맬과 함께 들어오는 기차를 기다리던 과거와는 달리, 동행자가 없다. 따라서 그를 괴롭히는 생각은 맬의 대사, "Death is the only escape", 죽음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것이다. 위험한 신뢰의 도약을 하기엔 그의 믿음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후회 섞인 나날들을 보내고 싶지도 않다. 결국 믿음과 후회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에게 탈출구는 오직 죽음 뿐이다. 여기서 재밌는 건 역설적이게도 그 죽음마저 자살을 시행함에 있어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용감하지 않은 코브는 죽음을 택할 수 없었고, 후회하는 나날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또한 결정적으로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자 하는 그의 귀향욕구는, 그가 leap of faith를 뛰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코브는 영화 내내 꿈 안에서 자신을 훼방놓는 자기 무의식의 파편 맬을 총으로 쏘지 못하는 등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럴 때마다 대체 동행자인 아리아드네의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의 귀향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결정적으로 림보에서 그가 데려와야만 했던 인물이 다름아닌 사이토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사이토의 최대 재평가 포인트가 드러난다. 영화 초반에 선제시되었던 동양풍 대저택에서 코브와 사이토가 재회하는 수미상관적 구조를 통해 영화는 결말을 드러낸다. 이 대저택에서 사이토는 노인마저 훌쩍 넘기고 징그러울 정도로 초고령인 노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는 이미 반쯤 까먹어버린 코브의 도래를 기다리며, 후회에 잠긴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림보 속에서 사이토가 내린 결단은 코브가 분명 자신을 구원하러 와줄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에 기반하여,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후회에 가득 찬 노인'의 형상을 자처한 것이다. 그의 기다림이 자신의 운명을 코브에게 내맡긴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닌, 자발적이고 용감한 결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통해 영화 초반 대립항으로 제시됐던 'leap of faith'와 '후회하는 노인'은 통합된다. 이는 분명 후회하는 노인을 두려워해 leap of faith를 택했던 코브와는 비교되는 것이다. 유일한 대안으로서의 믿음이 아닌, 불구덩이에 들어갈지언정 보존하고자 하는 '믿음'. 아마 코브 자신을 포함한 그 어떠한 팀원도, 결말부의 사이토처럼 하염없이 코브를 기다리지 못했을 것이고, 잠에서 깨고난 뒤에도 코브와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환각에 빠져 광인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사이토가 코브에게 제시한 leap of faith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요구한 것이고 결말부의 기다림을 통해 이 과업은 완수된다.
이처럼 사이토는 기술적이거나 물리적으로 영화 속에서 부각되는 인물은 아니지만, 코브의 정신적 구원자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3단계 꿈에서 죽기 직전에도 힘을 내서 적들을 제압하듯, 그는 '초인'이나 심지어는 '메시아'로 그려진다. 하지만 결함 가득한 범인凡人의 입장에서 이런 초인적 정신력을 가진 등장인물은 선망의 대상이 될지언정 귀감의 대상으로 삼기엔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이토의 멋드러짐과 비교되어 평가절하된 코브에게 되돌아가야 한다.
코브는 영화에서 어떻게 귀향이라는 대과업을 완수했는가? 그의 과업은 유한자에게 허락된 유일한 구원의 통로, leap of faith를 통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좁은 의미의 자기구원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가 집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정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이토와 정신적 지지대가 되어준 아리아드네는 물론, 아서의 충실함과 임스의 재치, 심지어는 유서프나 피셔까지 해서 그 모든 것이 코브를 도와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자기구원은 사실 타인구원이었다. 결국 앞서 언급한 번지점프대 앞의 인간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점프대에서 발을 내딛는 것일 뿐이며 나머지는 타인이나 운명—또는 숙명—의 도움을 기다려야 한다.
코브를 기다린 사이토가 코브의 귀환을 결코 확신할 수 없었던 것처럼, 타인이나 운명에 의한 구원 역시 100%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그리고 동시에 흥미롭게도— 이러한 불확실성 탓에 우리는 더더욱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의 결단 이후 사건들을 아주 긴박한 형태로 조밀하게 짜맞춰 종래에 구원을 이룩해내는 코브의 귀향 서사 <인셉션>은 따라서 본보기적인 신화로 간주되어야 한다. 설령 현실이 신화와 달라 그의 귀향이 실패로 귀결되었다 하더라도, 짐작컨대 코브는 노인이 될지언정 영화의 ost같은 외침을 울부짖었을 테다.
Non, je ne regrette rien.
아니요, 후회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