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young Abby Lee Nov 14. 2020

격리 중 한국 음식이 생각났다

[자가격리편 #4] 이동의 자유

자가격리 5일 차. 불도 안 끄고 잠들어서 새벽에 깼다. 뭐 하다가 잠들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어젯밤에 생각지도 못하게 메일 한 통을 받고 울컥했던 기억만 난다.

...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와이파이가 느리다 보니 대용량 다운로드를 못해서 격리 끝나고 꼭 들어보겠다고 연락드렸더니 ‘매주 보낼게’라고. 하하. 안 보내주셔도 된다구욧! (유튜브 저화질 오프라인 다운로드가 더 빨라요.)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잠이 안 와서 글을 쓰다가 그대로 아침을 맞았다. 아침 먹고 자야지 싶어서 7시 반 넘어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얼른 식사를 가져왔다.

오늘도 또우지앙은 따뜻했다. 첫날의 차가운 또우지앙 그리워

언제나와 같은 또우지앙(豆浆, 두유), 계란, 그리고 만두. 심지어 며칠 전 정말 맛있게 먹어서 다시 나오길 기다린 야채버섯 만두다. 오른쪽 만두는 약밥 같은 느낌. 그런데 음식이 잘 안 먹힌다. 야채만두도 속만 먹고 말았고, 약밥 만두는 두 입 정도 먹다가 내려놨다. 어제 저녁부터 입맛이 없다.


어제 점심이 진짜 역대급으로 맛있었는데, 저녁부터 왠지 모르게 물리기 시작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게 오늘 아침까지 이어진 거다.

격리 4일차 식사 아침(위) 점심(좌) 저녁(우)

결국 도시락을 정리하고 사과 하나를 씻어왔다. 사과도 반 정도 먹다가 내려놨다. 잠을 잘 못 자서 그런 건가?


10시 즈음되니 언제나처럼 노크 소리가 들린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请稍等).”

후다닥 마스크를 끼고 문을 연다.

“36.5도(36.5度).”

저 멀리서 체온을 잰 직원은 숫자 하나를 남기고 자리를 뜬다.


이번 격리 기간 동안 가장 많이 쓴 표현 하나를 꼽으라면 무조건 ‘잠시 기다려주세요.’ 请稍等, 请稍候, 稍等一下 등 다양한 변주를 주면서 쓰고 있다. 마스터하겠네, 마스터하겠어.


책상 위에는 사과 반 쪽이 놓여있다. 그냥 버리기에는 금쪽같은 사과다. 결국 나머지도 먹었다.


11시 반. 점심 도시락을 열었는데, 숨이 턱 막힌다.

매번 모든 반찬이 다 기름에 푹 젖어 있어서 며칠 먹으니까 물려버렸다. 장기 여행하면서 한국 음식이 그리웠던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음식 선택권이 없어서 그런가?

기름에 젖지 않은 담백한 반찬과 생야채가 먹고 싶어

가장 기름기가 적어 보이는 양념 닭고기를 집었다. 간이 세고 달다. 아... 오늘은 이대로 안 되겠는데? 오늘이 며칠 째더라? 5일 차지? 그럼 1/3 된 거니까 비상식품 까먹어도 되겠다.


캐리어에서 김을 꺼냈다. 압축김이다. 존재조차 몰랐는데 지인분 덕에 그 위대한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압축김이라 엄청 얇다 후훗

가로로 샥샥 접고

세로로 한 번 접어서

봉투 입구를 가위로 자르면 끄읕. 그리고 남은 김은 고무줄로 봉인. 이 김을 먹으려고 가위랑 고무줄을 일부러 챙겨 왔다.

자, 이제 잘 잘렸겠지??

흠, 아직 잘 안 잘린 녀석도 있지만 대충 먹으면 돼지.

점심 클리어-


한숨 자고 일어나서 TV를 보는데 역할극 중 젊은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말한다.

“사장님, 상의 드릴 일이 있어요. 저는 언제 정규직으로 전환되나요?”

老板,我有事情跟您商量一下。我什么时候转正么?

뭘 하는 프로그램인지는 결국 파악 못 함

정규직 전환转正(zhuǎn zhèng)이라고 표현한다는 걸 하나 배웠지만, 중국도 한국처럼 비정규직, 정규직 문제가 있나 싶어서 살짝 씁쓸. 아직 중국 노동 시장을 잘 몰라서 뭐라 코멘트할 건 없지만. 뭔가 복작복작 노래도 하고 게임도 하길래 계속 틀어놨다.




아무래도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싶어 기내식 박스의 비상식량을 털어먹기로 했다. 그런데 소보로빵이 유통기한이 지났네? 유통기한保质期(bǎozhìqī)라고 한다는 건 하나 건졌다.


박스 안을 살펴보고 있는데 TV에서 웨이야라는 이름이 계속 들린다. 내가 아는 그 웨이야??

진짜 웨이야(薇娅)​다! 리자치(李佳琦 Austin)와 함께 알리바바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인 타오바오 즈보(淘宝直播) 진행자로 무척 유명한 왕홍(网红 인플루언서). 직업적으로 어려운 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중국판 블랙프라이데이인 광군제 기간에 3일 동안 1시간 반밖에 못 잤다고. 웨이야를 이렇게 티비에서 우연히 보고. 중국 현지가 좋긴 좋다?


아무튼 오늘은 뭔가 달달한 걸 먹어줘야 할거 같아 초콜릿을 먹기로 했다. 초콜릿만 먹으면 이 소중한 시간이 너무 금방 끝날 테니 차 한 잔과 함께 최대한 음미하기로 했다.

두둥

물을 끓이려고 휴대용 전기포트로 눈길을 돌렸는데,

이 친구는 잘못이 없다

5일 만에 먼지가 이렇게 쌓이나? 안돼에에에.... 이런 거 눈에 들어오면 안 된다 말이야. 난 청소하기 싫다구.

침대 옆 탁자까지 먼지가아아아아

원래 이렇게 먼지가 잘 쌓이나...? 방 안에서 뛰는 것도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곳만 닦았다.


마침 3시가 넘어 체온 측정도 마쳤고, 이제 차 마실 준비를 해볼까?

급하게 산 휴대용 전기포트. 쿠팡 고마워!

딱히 자가격리 준비를 안 하던 나지만 출국 며칠 전에 우연히 자가격리 후기를 보고 급하게 주문했다. (사실 청소도구들도 다 출국 전 날에 샀다.) 호텔 전기포트의 위생은 믿을 수 없다니 부피가 적은 이 녀석이 제격이다. 캠핑을 안 하니 이런 제품이 있는지도 이번에 알았다. 그럼 물을 올려두고 포장지에 적힌 중국어부터 읽어볼까?

초록초록한 포장지

상품명부터 어떻게 읽는지 모르니까 네이버의 힘을 빌리자.

대충 써도 알아먹는다

흠, 榨菜는 쓰촨 성 식물이고, 泡(pào)는 물에 담그다는 뜻이니 찻잎째로 물에 담그면 된다는 건가?


净含量(jìnghánliàng)은 실질 중량이란 뜻이고, 성분표의 钠(nà)는 나트륨이구나. 깨끗하다(干净)의 净을 이런 식으로도 쓰네. 그럼 이제 뜯어볼까?


트득. 아니 근데 이게 무슨 냄새야.

찻잎이 아니라 웬 반찬이...?

그제서야 사전의 두 번째 의미를 읽어보았다. ‘ㅇㅇ해서 절인 식품’ 아... 1번만 읽었네. 당연히 차라고 생각해서 무조건 차에 맞추어 해석했던 거다. 너무 차 비주얼이라 뇌의 판단이 손의 감촉조차 이겨버린 거다. 이 허탈감이란.


호텔 방 안에 티백이 있긴 한데 청소상태로 보건대 이 친구는 이 방에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 같다.

여기도 净含量과 保质期가 또 나온다

일단 19년 6월 생산에 유통기한이 18개월이니 먹을 수 있긴 하다. 유통 기한이 거의 다 되었지만. 그래도 티백 박스의 먼지를 보면 안 먹고 싶다.

이 방이 유독 먼지가 잘 쌓이는 걸까, 내가 이상하게 생활하는 걸까

나중에 정 마시고 싶으면 마시겠지만 일단 지금은 탈 나면 안 되니까 깨끗하게 패쓰- 초콜릿만 낼름 먹었다.


그때, 갑자기 직원한테서 연락이 왔다.

중국어, 영어 설명이 함께 왔다

위챗페이로 숙박비랑 식비를 지불하라는 공지사항이다. 숙박비 3,108위안(52만 원), 식비 815위안(13.7만 원). 총합 66만 원이니 하루에 5만 원도 안 하는 저렴한 가격. 담당 직원이 바뀐 터라 다시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지금 은행 계좌가 없어서 위챗페이 인증받을 수가 없어요. 격리 해제 이후에 현금으로 내도 될까요?

您好,我现在没有银行账号,无法获得微信支付认证。可不可以隔离解除后以现金支付?

“가능해요. 마지막 날 내면 됩니다.”

可以的。最后一天付就可以了。


오케이, 해결되었으니 문자나 뜯어볼까. 이분도 ‘哦(o)’라는 어기 조사를 문장 끝에 쓰네. 친구도 문장 끝에는 쓰던데. 뉘앙스 찾아봐야겠다. 여기서 어기 조사 了(le)는 왜 쓰는 거지? 얘도 날 잡아서 파야겠네? 캡처(截图) 이 단어는 진짜 많이 쓰는데 맨날 성조를 잊어버린다. 아예 메모해놔야지. 截图(jiétú) 스크린 캡처.




당은 섭취했으니 몸이라도 움직여야겠다 싶어서 스쿼트를 했다. 하나 둘 하나 둘. 피가 도니까 기분이 좀 낫다. 창 밖을 내다보는데 오른편에 개천이 있다. 우와, 이걸 왜 지금까지 몰랐지? 나 물이랑 나무 엄청 좋아하는데.

보일건 다 보이는 창문

밖에 걷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동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된다. 일주일씩 집에만 있어본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 자의로 선택한 것과 타의로 발이 묶여있는 건 정말 천지차이다. 그래, 오늘 인심 썼다. 저녁 맛없으면 라면이나 끓여먹자.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어느 지역에 집을 구하면 좋을지 잠깐 찾아봤다. 아직까지 집을 적극적으로 찾을 생각이 안 드는 건 ‘뭔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기 싫어서일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이 기간의 느낌을 헤치기 싫어서일까.


5시 반 넘어서 도착한 저녁은 나쁘지 않았다. 야채가 기름에 푹 젖지 않아서 라면까지 먹을 생각은 안 들더라.

닭고기, 두부볶음(?), 콩고기 같은 느낌의 고기

그래도 아직 많이는 못 먹겠다.

식사 끝-

10일을 더 있어야 하니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어떻게 변화를 주지? 어떤 변화를 주지??


매거진의 이전글 중국에도 인터넷 용어가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