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처음으로 본 19금 영화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였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우리 가족은 엄마의 셋째 동생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엄마가 밖에서 돈을 버는 동안, 22살 이모가 6살 나와 4살 동생을 돌봐주었다. 이모는 우리를 엄하게도 키워서 동생과 나는 독재자의 눈을 피해 금기된 욕망을 채우느라 매일이 바빴다. 콘푸로스트를 사면 이모가 배급해 주는 한 그릇을 달게 먹고, 어떻게 하면 이모 눈을 피해 한 움큼을 더 먹을 수 있을지 궁리했다. 9시 이후로는 티비가 금지이기에 볼륨을 1로 줄여놓고 이모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동생과 티비 앞에 붙었다. 눈높이 학습지는 밀릴 수밖에 없는지라 사이좋게 책장 뒤로 쑤셔 넣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2살 이모는 그저 애기였을 뿐인데, 우리 둘을 어떻게 돌봐주었을까. 어쩌면 우리 셋은 같이 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이모를 통해 책과 영화를 배우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내가 겪은 대부분의 문화적 자극은 이모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모가 읽는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은 내 보물창고였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나, '데미안' 같은 책을 빼서 알 수 없는 말들을 넘겨보는 것으로 나는 자랐다.
이모는 영화를 많이 보고 많이 보여줬는데 초등학생이 볼 수 있는 영화는 손으로 꼽을 수밖에 없으니, 이모가 영화를 보여주려면 15금과 19금을 넘나들 수밖에 없었다. 8살 즈음부터 15금 영화를 보고, 고학년부터는 19금 영화 중 야한 장면을 빼고 보기 시작했다. 이모가 먼저 보고, 인생에 꼭 필요하다 싶은 영화를 선별해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19금 영화를 볼 때면 이모가 소파의 가운데 앉고 왼쪽에 나, 오른쪽에 동생이 앉았다. 보다가 야한 장면이 나온다 싶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른 이모 등 뒤로 숨었다. 동생과 얼굴을 마주 하고 얕은 숨을 쉬며 기다리다가, 이모가 “이제 됐어.” 하면 다시 나와 영화를 이어볼 수 있었다.
그렇게 Leaving Las Vegas를 봤다. 이모는 이 영화가 정말 좋은 작품이라고, 어른이 보는 영화지만 너네도 한 번은 봐야 할 거 같다고 설명했다. 나는 어쩐지 비장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풀린 눈과 술병을 건네는 엘리자베스 슈의 관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영화의 노란빛과 몽환적인 음악에 가슴이 자꾸 간지러웠다. 그러다 어느 장면에서는 꽉 하고 마음이 아팠다. 그 아픔이 어떤 뜻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