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날, AI가 내 문장을 대신 써버렸다. 새로운 도구가 하나 생긴 것뿐이라고, 업무를 조금 더 빠르게 해 주고 반복되는 일을 덜어주는 변화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사무실에 앉아 특허 명세서를 쓰고 있었다. 커서는 문서 한가운데에서 깜빡이고 있었고, 다음 문장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잠시 생각이 멈췄다.
그 짧은 정적 사이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AI를 열었다.
몇 초가 지나자 화면에는 내가 쓰려던 문장보다 더 매끄럽고, 더 완성도 높은 문장이 떠 있었다. 문법은 정확했고 논리는 단정했으며, 구조도 깔끔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잘 쓴 문장이었다.
나는 잠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감탄이 먼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밀려온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그 문장이 틀려서가 아니라, 너무 맞았기 때문이다.
그 문장은 내가 오랜 시간에 걸쳐 다듬어온 문체와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어깨너머에서 내가 하려던 말을 먼저 말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리듬과 선택지가 낯설게 다가왔다.
나는 13년 차 변리사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문장을 썼고, 그만큼 많은 선택을 해왔다. 발명을 설명하는 문장, 권리를 지키는 문장, 분쟁을 피하기 위한 문장들이다.
그 문장 하나하나에는 기술만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과 책임이 담겨 있다고 믿어왔다. 어떤 표현을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그 결과는 결국 누군가의 몫이 된다. 그래서 문장을 고르는 일은 언제나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 그 믿음이, 몇 초 만에 흔들렸다. AI는 나보다 빠르고 효율적이며, 지치지 않는다. 내가 몇 시간을 고민해야 나오는 구조를, 단숨에 정리해 냈다.
이제는 ‘잘 쓰는 문장’만으로 내가 특별하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시간을 들여 쌓아 온 숙련이, 생각보다 쉽게 압축되는 순간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사무실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책상은 같은 자리에 있었고, 컴퓨터도 그대로였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방식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어떻게 쓰지?”를 먼저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다른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이 문장을 내가 책임질 수 있는가.”
AI가 제안한 답이 정답처럼 보여도, 그 문장이 만들어질 맥락과 결과를 누가 감당할지 생각하게 되었다. 문장을 고르는 기준이 달라진 것이다.
기술은 분명 내 일을 대신해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은 더 쉬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판단의 무게는 커졌다. 빠른 답이 늘어날수록, 느린 확신이 필요해졌다. 정답을 맞히는 능력보다, 틀렸을 때 책임질 수 있는 태도가 더 중요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AI가 위협적인 이유는 내 자리를 빼앗아서가 아니라,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술은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나를 흔들고 있었다.
이 책은 AI 기술에 대한 분석서가 아니다. AI를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안내서도 아니다. 이 글은 AI 옆에서 일하게 된 한 인간이 자신의 감정과 기준을 다시 세워가는 기록이다.
나는 AI와 경쟁하고 싶지 않다. 비교하고 싶지도 않다. 그 대신, AI가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더 분명히 인식하고 싶어졌다.
책임을 지는 일.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일. 말이 멈춘 뒤에도, 그 침묵을 서둘러 채우지 않는 일.
모호한 상황에서 결정을 미루지 않고 선택하는 일, 정답이 없어도 관계를 망치지 않는 방향을 고민하는 일. 이 모든 일은 느리고 비효율적이며, 때로는 흔들린다.
하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아직 ‘사람으로 일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 불완전함이 나를 이 자리에 붙잡아둔다. 그래서 쉽게 포기할 수 없다.
AI는 점점 더 인간을 닮아가고 있다. 그럴수록 인간은 더 인간다워질 수 있을까, 아니면 인간다움이라는 기준 자체가 사라질까. 나는 아직 그 답을 모른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멈추고 싶지 않아서다.
AI가 점점 더 많은 일을 대신해 주는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사람으로 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