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이를 둔 부모에게, 지금의 혼란도 성장입니다

아이들의 삶을 또 응원하며

by 함영석 변리사

자라나면서 내 사춘기의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겉으로 드러나는 '지랄'같은 행동보다는, 속으로 혼자 방황하는 시간들을 더 많이 보냈다는 것이 지금생각해 보면 사춘기의 시간이었을지 모르겠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사춘기를 겪는 스스로도 어찌 보면 힘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정한 거리에서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기가 참 힘든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들의 사춘기는 정말, 갓난아이를 밤새 2시간마다 분유를 먹이며 잠 못 이루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생활들에 암담할 때 보다도, 더욱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들인 것 같은 느낌을 순간 순간 받게 된다.


무엇인가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려고 하면 할수록, 실타래가 점점 꼬여서 어느 순간 꼬여진 실타래를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리니 말이다.

모든 상황들이 꼭 해결해야 되는 것은 아닌데, 직업병처럼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하고 답을 찾으려고 하다 보면, 아이들을 다그치고 그들의 말보다 내 말이 더 앞서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첫째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가면서, 처음 맞는 아들의 사춘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기억들이 난다.

장난 삼아, 둘째와 막내에게 너희는 형처럼 사춘기 하지 말아라.. 이렇게 얘기하곤 했는데,

현재 진행 중인 둘째의 사춘기나, 사춘기를 하려는 막내를 보면, 역시나 사춘기는 그들의 의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사춘기는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나 지금 자라나고 있으니, 나에게도 스스로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라고 외치는 것 같다.

그렇게 외치는 소리보다,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지금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외마디 외치는 나의 모습은 정말이지 아이들의 성장을 돕고 있는 부모가 맞는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래도 처음보다 두 번째는 수월한 것인지, 이제는 실타래를 애써 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꼬이면 꼬인 대로 한 번 두고 보게 된다. 스스로 꼬인 것처럼, 또 스스로 풀릴지도 모르고, 또 꼬여 있는 실타래를 그대로 두는 것이 무엇이 문제일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생각과 행동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군분투하며 이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임은 분명한 것 같다.


자녀에서 독립적인 인격체로 나아가야 하는 자녀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나의 부모님도 나를 끝끝내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고 떠나보내기가 언제였을까 생각해 본다.

내각 또 그렇게 독립하여 살아가게 된 것이 또 언제쯤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고치 속에 긴 시간을 보내고 끝내 나비로 변화되는 것은 마법과도 같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로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애벌레와 나비를 전혀 다른 객체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그만큼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현실과 모습은 우리가 무언가를 판단할 수 있는 효과적인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알게된다.


언젠가 나비로, 아니면 또 무언가로 변화되어 날아갈 자녀들의 삶 속에, 조금은 변화를 위한 과도기와 같은 시기들을 온전히 감내하고 그 시간들을 끝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고치를 벗어 나올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를 또 응원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내 눈앞에 모습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도저히 보이지 않지만, 결국 찬란하게 빛날 아이들의 미래를 말이다.


오늘 또 잔소를 늘어 놓고, 스마트폰과의 싸움, 피씨방과의 사투를 벌이는 나이지만,

결국은 깨고 나올 그들의 고치를 이제는 억지로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볼 생각은 버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온전한 독립된 그들이 성장하여 힘껏 벌리고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하고 응원하면서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아이, 낳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