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의 소멸 : 살인이 던지는 실존적 질문

SF 소설 『수확자』와 드라마 <소년의 시간>이 그려낸 죽음의 역설

by 이표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악한 범죄 '살인'이 오히려 가장 숭고한 일이 된다면? SF 소설 『수확자』시리즈에서 인간들은 더 이상 죽지 않는다. 죽음에 이를 만큼 치명상을 입어도, 심지어 사고 현장에서 즉사해도 재생 센터에서 최대 사나흘 정도 머무르면 회복된다.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회춘하여 원하는 나이로 살 수 있다. 하지만 인구의 비약적인 증가는 평화를 무너뜨리므로 ‘죽음’이 필요하다.


결국 인구수를 조절하기 위해 타인의 목숨을 거두는 조직을 만들어 낸다. 그들이 바로 수확자들이다. '사망 시대'로 불리던 과거엔 '자연'이 선사하던 죽음을, 이제는 수확자들의 '수확' 행위를 통해 인위적으로 얻는다. 죽음은 두렵지만 동시에 위대한 것이므로 사망 시대의 자연이 그러했듯, 타인에게 영원한 죽음을 선사하는 수확은 경외를 자아낸다.


하지만 수확자가 아무리 숭고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한들, 그들 역시 사람이며 수확에 임하는 자세가 다르다. 대표적으로 수확자 패러데이와 수확자 고더드의 견해가 다르다. 패러데이는 수확이 인간들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필수적이라고 해도, 남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에 경각심을 가지고 산다. 스스로 고행하는 환경을 만들어 마치 종교인처럼 본인을 통제한다. 수확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패러데이는 존경받는 위인이다.


(이 세계관에서 콘클라베는 수확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안건을 나누고, 새 수확자를 시험하는 기간으로 묘사된다. 로마에서 열리는 콘클라베가 수확자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행사로 묘사되는 것을 보면 누구나 바티칸을 떠올릴 것이다. 수확자 조직을 사회 질서와 유리된 철학적 영역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반면, 수확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수확자 고더드는, 왜 수확을 자랑스럽게 여기면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패러데이 같은 사람을 위선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수확을 스포츠처럼 즐기며, 무작위로 다수를 수확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그러면서 본인은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한다.


독자가 패러데이를 존중하고 고더드의 존재가 불편한 까닭은 '사망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똑같이 생명을 앗는 행동을 하더라도 패러데이는 그것을 고통으로 인지하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대신해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확을 즐기는 고더드는, 우리 눈에 그저 살인에 미친 사이코패스이다. 작품 속에서도 고더드는 이질적이다. 수확자 사이에서도 조직이 세워진 숭고한 목적을 흔드는 자가 달갑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확자의 힘으로 다른 이들을 통제하고픈 욕망 때문에 그에게 설득되기도 한다.


ⓒ열린책들


고더드의 존재는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다시금 묻게 한다. 왜 ‘살인’이 나쁜 것인가. 이에 대해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에서 철학적으로 설명한다. 같은 반 친구 케이티를 살해한 13살의 남자아이 제이미에게 심리학자는 묻는다. “‘죽음’이 무엇인지 아니?” 이 질문은 살인 행위의 경중을 알지도 못하는 그에게 논리적인 영역에서 설명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케이티는 이 세상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 네가 케이티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든, 네가 뭐라고 하든 걘 이제 없어. 그 애를 죽인 게 누구든, 그 사람은 케이티 미래의 가능성을 다 소멸시킨 거야.”


제이미는 살인의 무게를 낮게 생각했다. 그는 케이티를 만지고 성폭행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않았다고, ‘봐줬다’고 생각한다. 그는 피해자가 죽은 것보다 성행위를 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거부한 피해자를 탓한다.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막히고 아연해지는 그 말에, 심리학자는 정확하게 짚어준다. ‘살인은 그 사람의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행위’라는 것을.


ⓒ넷플릭스


이처럼 살인을 ‘가능성의 소멸’로 보는 관점은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그중에서 20세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연상케 한다. 하이데거는 ‘실존(existence)’을 ‘다가올 미래를 지금 미리 염려(Sorge)하면서 존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한 가능성 중에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 ‘죽음’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이므로 죽음을 직면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죽음을 직면하는 것만이 진정한 삶을 누리는 방법으로 보았다.


죽음이 사라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수확자』는, 의미 없어 보이는 영생을 잘 살 수 있게 만드는 방법으로 ‘눈에 띄도록 로브만 입고 다니는 수확자’로 설정한 것이다. 수확에 저항하면 그들이 사랑하는 이를 대신 수확하고, 순응하면 사랑하는 이에게 보상을 준다는 설정도 죽음을 직면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소설 속 사람들은 자신들의 유토피아에 갑자기 나타나는 수확자로부터 때로는 뒷걸음질 치고 때로는 청탁을 시도하지만, 결국에는 그 존재를 마주한다.




우리는 죽음을 잊고 살다가 문득 불안에 사로잡힌다. 이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담담히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왜 사는지’ 같은 물음을 통해 스스로 결단으로 이른다. 확실한 ‘죽음’이라는 가능성을 향해가면서 나만의 고유한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삶. 이처럼 실존주의 철학은 위안을 주면서 동시에 삶을 무겁게 만든다.


『수확자』가 그려낸 세상은 극단적이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죽음이 없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역설적으로, 죽음이 있기에 우리 삶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이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하려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다. 수확이 숭고한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견뎌내려는 인간의 의지가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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