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채널을 돌리다가 야구 경기를 보았다. 타자 한 명이 투스라이크 상황이었다. 스윙 한 번으로 성패가 갈리는 상황. 그를 보며 해설진은 설명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주목받던 유망주가 꽤 오랜 기간 슬럼프에 빠져있다고. 텁. 가죽 글러브 안에 공이 꽂혀 들어가는 소리가 화면 너머로 선명하다. 타자는 방망이를 휘두르지도 못한 채로 아웃되었다. 삼진이다.
슬럼프. 스포츠팬으로서 나는 선수의 슬럼프에 딱히 감흥이 없었다. “그래, 고생 많았고 잘 회복하고 와.” 딱 그 정도 감상. 아니, 솔직히 분노에 가까웠을 것이다. 받고 있는 연봉이 얼만데 이 중요한 시기에 슬럼프라니. ‘허위매물’이라든지 ‘유리멘탈’이라는 식으로 선수의 특성을 설명하며 비난했다.
그런데 내 인생의 슬럼프가 길어질수록 그들이 겪을 고통의 깊이가 이해된다. 스포츠는 어린 시절부터 하나에 매달린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것만이 답인 것처럼, 모든 일상이 운동 중심으로 돌아간다. 한 선수를 키워내기 위해 가족들의 희생도 크다. 그렇게 해서 바늘귀를 통과해 프로 선수가 되어도 젊은 신체가 무기인 만큼 전성기는 짧을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짧은 그 시간에 슬럼프가 찾아오다니. 슬럼프(slump)는 19세기 북부 독일어 ‘슬룸펜(slumpen)’에서 유래했다. ‘떨어지다, 추락하다, 푹 꺼지다’라는 의미로, 원래는 경기가 후퇴하는 현상을 나타내는 경제용어로 쓰이다가 20세기부터 스포츠 영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정신적인 영향이 매우 큰 슬럼프는 의식할수록 심해진다. 지속적인 좌절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이어지며, 이를 ‘개인적 게으름’이나 ‘자책’으로 받아들일 경우, 악순환에 빠진다. 길어질수록 선수는 조급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스포츠 선수의 슬럼프는 모두에게 주목받는다. 혼자 정리해서 나올 여유는 없다.
반대로 슬럼프의 극복 또한 모두가 주목하기에 가능하다. 물론 선수 본인이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훈련 스케줄을 조절하여 신체적으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계획을 함께 세워 작은 성공 경험을 쌓을 수도 있다. 주변의 격려 역시도 큰 도움이 된다. 일단 자신의 상태를 공유하면 누군가는 응원의 말로, 누군가는 실질적인 도움으로 손길을 내민다.
나는 내 인생의 또 다른 공백기를 겪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와 다르다고 자위하지만, 이번엔 나이가 문제다. 늪은 교활하다. 얕은 곳으로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깊은 곳에 들어와 있는 날 발견한다. 더 끈적하고, 더 차갑고, 더 외롭다.
그런데 내가 이런 늪에 있다고 알리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많은 이들이 도왔다. 밧줄을 던지기도 하고, 발을 가볍게 털면서 나오라고 하기도 한다. 때로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끼리 각자의 늪의 깊이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말하다 보면 바닥에 발이 닿는다. 마냥 깊은 줄 알고 두려웠던 감정이 사라진다.
얼마 전 그 선수가 안타를 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 슬럼프를 극복한 신호탄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팬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포기했을 것”이라고. 어쩌면 슬럼프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불편한 선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