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스에 앉아 만드는 나만의 세계
파리에서의 한 달이 흘렀다.
좁고 좁은 감정의 방에 답답하게 숨어 지낸 지 한 달. 인체 내에서 바이러스와 홀로 싸우는 것, 그 이상으로 외롭고 고된 감정과의 싸움. 그 방에서 좀 나오라고 소리쳐도 들린 채도 하지 않는 녀석들.
하지만 그들은 그전부터 우리에게 살려달라고 신호를 주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외로움'이라는 감정도 느낄 수 없기에.
'그렇다면 내가 나갈 테니 따라 나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나 잠깐 숙소 앞 노천카페 좀 갔다 올게."
"비 오는데 괜찮겠어?"
아내는 옷을 챙겨 입는 나를 보고 걱정스례 묻는다.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다.
비 오는 날 노천카페의 테라스야 말로
지금 이 감정에 흠뻑 젖어들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들과 상관없는 폭풍들이 정신없이 휘몰아친 월요일 오전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수다뭉치들이
눈치 없이 뒤늦게 빠져나간 덕분에 지금의 빈자리들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만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에서 가장 지루한 오후 세시. 모두들 넋이 빠진 시간. 누구의 정신인지 몰라도 이미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 입구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배경과 빗물에 반사된 네온사인은 지금이 저녁시간대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느끼한 버터냄새와 코끝이 시린 빗물냄새에 이끌려 한 노천카페에 앉는다. 비는 점차 거세지지만 파리지앵들은
그럴수록 여유가 넘친다.
비를 피해 황급히 정리하는 벼룩시장의 상인만 있을 뿐.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열어도 좋으나 이 순간에 집중하기 위해 헤드셋을 꼈다.
파리의 5월은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햇빛이 뜨겁게 내릴쬐다가도 어느새 흐려져 비를 쏟고 바람으로 관광객들을 날려 보낸다. 날씨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변화무쌍한 한 달이다. 인간이란 경험하는 존재다. 우리 역시 한 달 동안 파리를 걸으며 새로운 것을 보고 느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더 넓게 보기 위해서 경험을 많이 하라고. 책을 읽고, 여행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면서 경험을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세상 보는 눈을 키웠더니 그보다 더 커진 것은 다름 아닌 '두려움'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세상을 예측하는 능력이 생겼다!
'이 세상은 얼마나 큰 두려움의 완전체인가!'
세상을 예측하면서 자신감은커녕, 더 많은 두려움이 겹겹이 쌓이게 된다.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걱정부터 앞선다. 우리는 이미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다 만나본 것이다. 나만의 세상에서 그것들은 이미 인격체가 존재하고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해졌다. 내가 만든 세상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이미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카페테라스에 앉아 바라보는 세상도 이미 내가 만들어낸 세상의 일부다. 내 옆에 앉아 있는 노부부 역시 내가 심어놓은 캐릭터다. 그들은 나의 지시대로 움직인다.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그들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 대화 하나하나가 내가 설정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 두려움은 조금 사라진다. 당신들도 당장 그렇게 해보아라!
세차게 내렸던 비가 그친다. 벼룩시장의 상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천막을 치우고 장사준비를 마친다. 그의 행동에 삶의 의욕이라든지, 자신감이라든지, 뭔가 대단한 게 있지 않다. 아이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행동한다.
지지-직. 라디오가 켜지고 나서야 방황하던 나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된다.
와인잔을 마저 비운다.
그 순간, 나는 그 벼룩시장의 상인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즐거움의 대상으로 묘사했다. 지금 테라스에 앉아 바라보고 있는 모든 피사체가 나의 무대이고, 배우들이다. 내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는 모든 것들을 꺼내야만 한다.
두려움의 경험과 두려움이 만들어낸 세계를 재창조할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경험을 바꾸는 게 아니라 이전 경험을 새롭게 바라볼 시선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의식의 영역이지만, 한번 인지하고 나면 연습이 가능하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나는 경험의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그러고 나서 한 번의 심호흡을 내신 뒤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느새 맑게 갠 파리의 하늘이 나를 맞아준다.
"나 왔어."
"어땠어?"
"날씨가 좋네. 우리 내일은 센강을 따라 좀 걸을까?"
"좋지."
잠깐이었지만 혼자 카페테라스에 앉아 빠졌던 사색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파리에 왔다면 한 번쯤 테라스에 앉아 눈에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사색을 즐겨보시길. 당신에게 많은 울림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다짐했다.
나의 무대, 나의 배우들에게 더 소중한 역할을 부여할 것이라고.
더욱 인간적이고, 더욱 활기차게. 나의 연극을 지켜보고, 나와 함께 하는 관객들이 두려움이 아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연극을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