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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네 Aug 02. 2021

죽이 먹고 싶은 날이 있다

펄펄 끓는 걱정의 마음

식욕이 돋는다. 호르몬 때문일까, 계절 탓일까, 그도 아니면 그냥 이렇게 식욕이 늘 활화산 같은 상태인 건가 곰곰이 생각하다 책상에 놓인 책들을 발견했다. 공지영 작가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 권여선 작가의 <오늘 뭐 먹지?> 그리고 김훈 작가의 <라면을 끓이며>. 나의 식욕은 아마 저 책들에게서 기인한 것 같다. 배가 고프다. 초콜릿이나 빵같이 주위에 쉽게 보이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을 허기다. 








기억과 추억이 담긴 음식. 어디 한 두 개겠냐만은, 요새 나는 부쩍 죽이 먹고 싶다. 죽은 보통 아플 때 먹는다지만 나는 종종 그 끈적하고 부드러운 것을 꿀떡꿀떡 삼키고 싶어 진다. 나는 신 김치에 콩나물을 넣은 방식을 가장 선호하는데, 이건 속을 달래는 용도라기보다는 안주나 해장용으로 제격이다. 냉장고 안에 자투리 채소가 있을 적엔 그걸 모두 쫑쫑 썰어 야채죽을 만들기도 한다. 흰쌀 죽이 설원 같다면, 야채죽은 봄의 꽃 밭 같아 먹기 전부터 괜히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그런 이유로 반찬도 없이 죽을 먹는다. 담백한 맛에 야채에서 나오는 특유의 풍미가 어우러져 끝도 없이 먹을 수 있다. 




                   이미지출처: 본죽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가장 좋아하는 죽은 남편이 만든 죽이다. 몇 년 전, 나는 장염에 걸려 호되게 고생한 적이 있다. 먹기만 하면 다 쏟아내는 통에 게토레이만 마셔 얼굴이 누렇게 뜰 정도였다.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닭고기 수프나 중국식 북어죽을 사 오곤 했는데, 나는 그것들에 입도 대지 못했다. 냄새가 역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남편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와장창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냥 하지 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힘이 없어 포기했다. '나름대로 정성 들여 만드는데 안 먹겠다고 할 수도 없고' …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도무지 남편이 미덥지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조심스러운 발소리와 함께 남편이 침대로 상을 가지고 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정말이지 쌀 이외엔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흰 죽이었다. 내 스타일이 아닌 죽의 자태에 난감했지만, 콧잔등에 땀이 맺힌 남편이 내미는 숟가락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참새 부리만큼 입을 열어 그 정성을 맛보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담백하고 말간 죽이 입에 착 들러붙는 것이었다. 곱다 못해 믹서기로 간 것 마냥 부드러운 죽은 흰쌀의 고소하고 산뜻한 맛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나의 질문에 남편은 당황했다. 잠시 이마를 긁적이던 그는 "끓여서 만들었는데"라는 지극히 교포 다운 어눌한 대답을 했다. 나는 피식 웃었지만 그 말에서 어쩐지 답을 들은 것 같았다. 재료도, 방식도 모두 특별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그저 특별한 건 애정이었다는 것을. 그 펄펄 끓는 걱정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권여선 작가는 그의 책 <오늘 뭐 먹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식이 짧은 죽음이라면, 단식 후에 먹는 죽과 젓갈은 단연코 부활의 음식"이라고. 나는 이렇게도 덧붙이고 싶다. 누군가의 애정에 허기지고, 걱정에 고플 땐 죽만 한 음식이 없다는 것을. 남편의 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속이 따스하게 든든해진다. 그건 지친 나를 일으키고 어찌어찌 한 발 나아가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죽에는, 특히나 남이 해주는 죽에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플 때 죽을 찾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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