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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네 Jul 23. 2021

집밥의 굴레

권여선 음식 산문집 <오늘 뭐 먹지?> 독서노트

오늘 점심에 무얼 먹었더라? 렌틸콩을 넣은 밥, 김치찜, 오이소박이, 멸치볶음, 콩나물국…. 그럼 어젠 뭘 먹었지? 렌틸콩을 넣은 밥, 김치찜, 오이소박이, 멸치볶음, 콩나물국…. 그저께, 그그저께도 마찬가지다. 요즘 같이 날이 더워 입맛이 똑 떨어지는 때엔 요리는커녕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기도 귀찮다. 그나마 반찬의 8할은 시어머니 덕이고, 반찬을 식탁에 내놓게 된 것은 남편 탓(덕)이다. 혼자 끼니를 때워야 했더라면 물에 밥을 말아먹거나 아님 간식 몇 개 주워 먹고 끝났을 게 분명하다.










집밥이란 말을 들으면 누구나 향수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입속에 고인 침을 조용히 삼키는데, 이건 순전히 집밥을 하지는 않고 먹고만 싶어 하는 사람들의 환상이 아닐까 싶다. "오늘 뭐 먹지?"라는 잔잔한 기대가 "오늘 뭐 해 먹지?"로 바뀌는 순간 무거운 의무가 된다.

p152 '집밥의 시대'



<오늘 뭐 먹지?: 권여선 음식 산문집>에 나오는 구절이다. 요즈음의 나를 이만큼 잘 설명하는 글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와닿는다.


코로나 사태 악화로 인해, 남편은 작년부터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처음엔 좋았다. 출퇴근에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가끔 남편과 장난을 치거나 커피를 같이 마실 수 있으니 덜 심심하고, 무엇보다도 밥을 혼자 먹지 않아도 되니 은근히 신이 났다. 내일 점심은 무얼 해 먹을까 고민하며 장을 봐오고, 혼자 먹을 땐 사용하지도 않던 이쁜 그릇을 꺼내고, 평소 마시던 것 대신 조금 더 비싸고 향 좋은 커피를 사기도 했다. '같이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음식을 맛있게 하는지, 식사시간을 '먹는다'가 아니라 '채운다'라는 동사로 만드는지 알게 되었달까. 다만 한 가지, 그때는 몰랐던 게 있다. 코로나가 이렇게 길어질 거란 걸….



Photo by Kim Deachul on Unsplash





재택근무가 장기전이 되면서 끼니를 때우는 게 귀찮아지고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반찬 투정을 하거나 음식을 가려 먹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나 집밥을 좋아한다.


집밥을 좋아한다.

집.. 밥을.. 좋아한다.

집... 밥을.... 좋아... 한다.


하루 두 끼 (점심/저녁)를 차리는 게 속되다 보니 재료를 사다가 손질하고, 볶고, 끓이고, 데치고, 접시에 가지런히 담는 그 일련의 과정이 고행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어머니 찬스로 반찬을 얻어먹는데도 그랬다. 게다가 그렇게 만들고 차린 음식인데, 먹는 건 고작 십 분, 십오 분이면 끝. 허무했다. '대충 먹으면 안 되나', '시켜먹으면 안 되나', '자기가 알아서 좀 차려먹으면 안 되나'…. 불만과 귀찮음이 차츰 쌓이며, 언젠가부터 내일 뭐 먹고싶냐는 질문에 '그냥 집밥이나 먹지 뭐'라고 대답하는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냥 집밥이 어딨어? "그냥"이 세상천지에 어딨냐고. 이게 다 내가 고생(?)해서 만드는 거잖아!









재택근무가 끝나고 다시 사무실 출근을 시작한 남편은 요새 식당 밥이 별로라며 가끔 투정한다. 뭐가 짜네, 맵네, 양이 과하네 등등 다양한 의견을 낸다. 나는 내 요리실력이 식당보다 분명 별로라는 걸 알기에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묻는다. "일 년 동안 내 밥 먹느라 고생했겠다, 그치?" … 집밥을 먹으며 눈치력도 제법 상승한 남편은 "집밥은 다르지"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집밥은 달라. 조금 맛없어도 맛있는 거야."

"...? "

"내 아늑한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해주는 밥을 먹는다는 건 맛이 있든 없든 그 자체로 좋은 거야"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고, 전혀 모르겠기도 한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내가 그간 먹어온 무수한 집밥을 떠올렸다. 엄마가 해주었던 것, 할머니가 해주었던 것, 간혹 아빠와 시어머니, 혹은 친구나 룸메이트들이 해주었던 집밥들. 무언가 부족하고 어딘가 과하고, 그럴싸한 플레이팅은 없으나 충분히 먹음직스럽고, 만든 사람의 취향과 입맛과 정성이 들어간 그 음식들. 떠오르는 건 맛보다도 기억이었다. 요리를 만든 사람의 생활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나누며 소중한 한 끼를 나누었던 그 기억뿐이었다.


집밥은 여전히 귀찮고, 그래서 혼자 먹을 땐 대충 때우기 일쑤겠지만 문득, 언젠간 오늘의 집밥을 기억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조금 맛없어도 맛있는 이 한 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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