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을수록 세상이 불편해진다
남편과 식당에 가면 늘 고기를 먹는 편이다. 스테이크, 삼겹살, 고기가 들어간 파스타나 두툼한 패티의 햄버거, 혹은 소시지와 햄이 듬뿍 들어간 부대찌개도 즐겨 먹는다.
"채식주의자들은, 진짜 맛있는 고기를 못 먹어봐서 그러는 게 아닐까?"
"이렇게 맛있는데 어떻게 평생 고기를 안 먹고살아?"
남편은 고기를 사랑한다. 지구가 멸망한다면 제일 마지막으로 무얼 먹고 싶냐는 질문에 '스테이크'라고 답하고, 가장 좋아하는 간식은 돼지껍데기 튀김(chicharron; 치차론)이며, 냉면 위에 삶은 계란이 없는 건 참아도 고기 고명이 없는 건 못 참는, 그야말로 육식주의자다. 나 또한 남편과 연애할 때부터 그의 입맛에 물들어 고기를 즐겨먹게 되었다.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을 늘이는 식단을 짜면서는 더더욱.
어느 날 친구가 '채식주의자' 선언을 했다. 채식에도 종류가 많은데, 그는 우선 붉은 육류를 섭취하지 않는 폴로(pollo) 채식으로 시작한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이 년 전 겨울, 양고기를 먹으며 '기가 막히네, 야 존맛이다, 양 다 죽었쉐이'를 외치던 그의 모습이 스쳤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건 친구도 마찬가지였는지, 핸드폰 너머로 다소 어색하고 머쓱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이, 내가 올 초에 다큐멘터리 보는 거에 꽂혔잖아? 그중에 육류 섭취에 대한 다큐도 있었거든. 볼까 말까 볼까 말까 하다가, 새로운 다큐 올라온 것도 없고 해서 봤는데.. (깊은 한숨) 근데. 야.. 거기서 소가.. 아니이, 소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야, 짜증 나게.."
저기.. 단지 소의 눈물에 마음이 돌아섰다구요, 선생님? 나는 이게 무슨 소녀스러운 전개냐고 되물으려던 것을 참고 그의 말을 계속 들었다. 그는 '어쩌다 그렇게 됐다'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몇 개월간 나름의 고민을 해왔던 모양이었다. 육류를 기르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어마무시하게 발생하는 탄소라든가, 전문가들이 지속적으로 경고하는 삼림 벌채와 생물 멸종에 끼치는 악영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에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이런 문제를 모른척하면서까지 고기를 먹어야 하냐는 생각이 마음을 괴롭혔다고 했다. 고기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으니 닭고기를 제외한 붉은 육류부터 소비하지 않겠다는 건 그런 고민의 흔적이자 현실적인 타협점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고기도 씹어 본 놈이 잘 먹는다는데, 웬만큼 씹은 친구가 내린 결정은 살짝 충격이었다.
친구가 소의 눈물을 보고 느꼈던 '짜증'은 일종의 찝찝함과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한 번 마주한 순간부터는 계속 마음 한 구석에 진득이 들러붙는.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작은 선 하나, 쬐끄만 씨앗 하나.
생각이 많을수록 세상이 불편해진다. 소의 눈물을 본 친구가 고기를 줄인 건, 어찌 보면 불편함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약속을 잡을 때 피해야 할 메뉴도 많고, 때로는 고기의 노릇하고 고소하고 기름진 맛이 그리울 날도 있을 테고, 나 하나 이런다고 세상이 얼마나 바뀌겠냐는 현타를 느끼는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불편해질수록 '나'는 곧게 설 수 있다. 그 모든 불편리함을 감수하면서라도 나의 가치관을 -설령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지켜낼 때에, 스스로의 인생을 조금 더 고귀하게 가꿀 수 있다. 이건 내가 세상에 얼마나 기여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나다울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플라스틱을 줄이는 것, 갑질을 일삼는 기업의 물건을 소비하지 않는 것, 불법 사이트에서 만화를 보지 않는 것, 그리고 나의 멋진 폴로 채식주의자 친구처럼 육류를 줄이는 것 등등. 각자의 방식대로 기꺼이 불편해질 때, 세상은 조금 더 살만 해 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