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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Dec 27. 2020

BBC 드라마 <남과 북> : 합리와 윤리의 충돌

※스포주의


어렸을 때부터 『오만과 편견』을 좋아했다. 다아시는 오만했고, 엘리자베스를 편견 있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 또한 다아시를 편견 있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자신의 생각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오만한 구석이 있었다. 이들이 스스로의 오만과 편견을 깨닫고, 상대방을 알아가면서 은근히 지지하고 옹호하는 모습, 그리고 마음이 깊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서사는 잔잔하고도 강렬하다. 이렇게 『오만과 편견』에 열광하는 나를 위해 동생이 드라마 한 편을 추천해주었다. 바로, 「남과 북North and South」이다.



19세기 영국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겔(Elizabeth Gaskell)의 소설을 BBC에서 드라마화한 작품이다. 제목대로면 '북과 남'일 텐데, 우리는 북한과의 사이 때문인지 '남과 북'이라는 순서에 익숙해서 '남과 북'으로 번역된 듯하다. 총 네 편의 회화로 구성되어 있어서 긴 드라마보단 영화의 짧은 호흡을 좋아하는 내게 알맞았다. 하지만 감상 후에는 더 보고 싶은 아쉬움에 딱 두 화 분량의 이야기가 더 있었으면 했다. 특히 존 손튼이 마음을 고백하기 전까지 손튼의 감정변화를 좀 더 오랫동안 살펴보고 싶었다. 물론, 짧은 구성 안에서도 인물의 서사뿐만 아니라 시대적 배경, 다양한 갈등상황 등 다채롭게 담아내었다. 인물의 손끝, 몸짓, 표정 하나하나 클로즈업하여 감정의 흐름을 최대한 잘 보여준 덕분에 훨씬 손튼과 마가렛의 관계을 긴장감 있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걸 좀 더 긴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을 뿐.




개스겔의 오만과 편견


「남과 북」은 「오만과 편견」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일단 남자의 경제적 혹은 사회적 지위가 여자보다 높다는 점이 그렇다. 손튼은 밀튼의 손꼽히는 사업가고 마가렛은 전 성직자의 딸일 뿐이다. 그리고 둘 사이의 오만과 편견이 팽팽하다. 우선 마가렛이 두꺼운 색안경을 끼고 손튼을 바라본다. 손튼의 첫인상은 자본을 위해 사람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다. 북부의 공업도시 밀튼의 첫인상과도 비슷하다. 노동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손튼의 모습은 강한 편견을 일으킬 만했다. 방적공장에서 화재로 인한 인명피해가 심각하기 때문에 주의를 주기 위함이었다지만, 폭력은 폭력이었다.


노동자를 아랫사람으로 여긴다는 마가렛의 지적은 틀리지 않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재고용을 간청하는 노동자를 차갑게 내치는 모습까지, 손튼에게는 고용주의 오만이 있다. 자신의 인문학 선생인 리처드 헤일에게도 사업과 관련해서는 참견하지 말라는 것까지 충고를 수용하지 못하는 오만일 것이다. 


마가렛은 손튼의 구체적인 상황을 들었을 때, 더 이상 존 손튼을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입을 꾹 다물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마가렛의 편견은 일방적이었고 무례했으나, 마가렛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이 또한  마가렛의 오만이다. 면직물을 누가 입냐며 새로운 방식을 수용하지 못하고 익숙한 방식이 우수할 거라 믿는 것도 오만이었다. 



합리와 윤리의 만남


출처: https://drama.uktv.co.uk/north-and-south/article/8-reasons-why-we-swoon-john-thornton/


이 작품이 『오만과 편견』과 다른 건, 시대상과 복합적으로 연결되면서 완전히 다른 인물 특성을 담고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새로운 갈등상황에 놓이고,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이다. 손튼은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산업혁명 직후 자본주의 시대에서 앞장서고 있는 면직물 공장주로, 경제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았다. 사람도 이익을 위해서 챙기는 냉철한 사업가였다. 특히 다른 고용주와는 달리 노동자의 건강을 챙기고, 식당과 같은 복지 시설에 신경쓰면서 더욱 퀄리티 높고 장기적인 노동력을 유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과 파업을 이끌었던 니콜라스의 고용을 반대하고, 이후 고용을 하더라도 그의 발언권이나 단결권, 단체행동권 등을 박탈하는 모습에서는 시대적 한계가 느껴졌다. 


출처: https://weheartit.com/entry/5198972


마가렛은 올곧은 인물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주변 시선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고지식함에 이런저런 입소문에 오르기도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마가렛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은 '선'이었다. 당시 자본주의로 움직이는 밀튼에서 마가렛이 외치는 방향은 비현실적이었지만 윤리적으로 옳았다. 많은 사람들이 마가렛의 주장을 비웃거나 비난했지만 존 손튼은 존중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의견을 굽히진 않고 끝까지 반대해서 결국 둘은 티격태격했지만.


두 사람은 자본주의의 합리와 윤리적 선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서 있었다. 마가렛은 손튼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 했고, 손튼은 마가렛을 이해하지만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선 마가렛의 말에 100% 동의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조금씩 대화하기 시작한 건, 마가렛이 손튼의 상황을 깊이 이해한 후였다. 손튼은 자본주의가 얽힌 자신의 상황에서도 최대한의 윤리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튼은 마가렛의 올곧은 외침에 더 귀를 기울이고 사업 운영에 윤리를 좀 더 챙기려고 시도한다. 그렇게 오만과 편견을 거두고, 합리와 윤리의 대척점에 서있던 서로를 바라보았다. 윤리는 합리를 이해했고, 합리는 윤리를 수용했다. 



노동자의 근로환경

출처: "NORTH & SOUTH MOVIE REVIEW" Maryann's Musings


산업혁명 시대 영국울 배경으로 한 만큼, 그 시대상이 잘 드러났다. 초록빛 남부와 회색빛 북부가 극명하게 대조되었고, 보풀들이 흩날리는 공장 전경이 펼쳐졌을 때는 '산업혁명'과 '방적기' 두 글자가 함께 쓰여있었던 교과서의 한 대목을 직접 지켜보는 듯 했다. 또,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일렬로 쭉 늘어서있던 기계들과, 흩날리는 보풀에도 마스크 한 장 쓰지 않고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열악한 근로환경을 실감했다. 베시는 폐에 들어간 보풀이 빠지지 않는다며 기침만 계속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하는 노동조합의 모습, 그리고 파업 이야기까지, 당시의 노동 상황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아직은 근로자 복지의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고용주들과 단체행동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제대로 외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며, 지금 우리의 근로환경이 아주 많은 발전을 거듭해온 결실이라는 걸 깨닫는다. 물론,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이 죽음의 위협에 맞서고 고생하고 계시지만.


노동자들의 삶을 살펴보는 손튼의 태도는 현재의 고용주들조차 갖추지 못한 자세다. 노사갈등이야말로 합리와 윤리가 제대로 충돌하는 지점이 아닐까. 이익 추구가 우선인 기업은 사람이 먼저라는 윤리와 이익 추구의 합리 사이에서 매번 저울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윤리보다는 합리를 선택하겠지.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사망함에도 불구하고, 근로조건 개선이나 산업재해 예방대책과 같이 사람을 위한 작업은 더디게 이루어진다. 




멀리까지 바라보며 합리를 추구할 줄 알았던 손튼은 마가렛을 만나 노동자 개인을 살피고, 그들의 식사까지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마가렛 또한 나중에는 뻣뻣하게만 들이댔던 윤리적 잣대를 잠시나마 거두고 밀튼의 방식을 옹호하고 이해한다. 합리와 윤리 사이의 합의점을 찾는 것은 요즘도 중요한 주제다. 손튼과 마가렛이 서로를 이해하고 교집합을 찾아가는 모습이 우리 삶의 어두운 단면에도 빛을 비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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