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량 Sep 07. 2022

발렌시아가가 신발을 찢은 이유

친구들이 하나둘씩 취업을 하니 술자리에 슬슬 명품 가방이 보인다. 회사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면 유명한 브랜드의 카드지갑이 식탁의 각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왜 이렇게 다들 명품 하나쯤은 끼고 사는 걸까? 명품 브랜드의 가치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얼마 전, 다음 인기글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발견된 신발”이라는 제목으로 시선을 끌었고, 운동화 사진이 큼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운동화는 전쟁 중에 발견되었다는 말처럼 흙먼지가 잔뜩 묻고 찢어지고 헤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발렌시아가 파리 스니커즈 80만원.”


파리 스니커즈 (출처: 발렌시아가)



파리 스니커즈는 100개의 한정 상품인데, 모두 다양한 모습으로 낡고 망가진 신발들이다. 이 괴상한 리미티드 에디션은 수많은 시선을 모으고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고 쓰레기통에서 찾아냈냐며 비아냥거렸고, 누군가는 패스트 패션이 초래하는 폐기물 문제를 떠올렸고, 누군가는 가난에 대한 조롱이라 지적했다.


발렌시아가가 이런 독특한 발표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2년 가을 레디투웨어 패션쇼에서는 모델이 쓰레기 봉투 같은 가방을 들고 등장했다. 누가 봐도 검은 비닐봉지 같아 보이는 이 가방은 사실 고급 가죽 가방이었다. 가격은 200만원이 넘었다. 2017년 봄 남성복 패션쇼에는 이케아의 투박한 프락타 쇼핑백을 모티브로 만든 가방이 등장했다. 큼직한 크기와 푸르른 색, 누가 봐도 이케아 쇼핑백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가격은 300만원 가까이 되었다. 파리 스니커즈, 비닐봉지 가방, 이케아 쇼핑백. 이 정도 되면 궁금해진다. 도대체 발렌시아가, 그리고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는 왜 이렇게 비싸고도 비싸보이지 않는 제품을 내놓는 것일까?


왼쪽: 발렌시아가 2017 SS Menswear, 오른쪽: 발렌시아가 2022 FW Ready-to-Wear (출처: Vogue)



이 명품 같지 않은 명품들은 오히려 로고에 종속된 명품의 가치를 시니컬하게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 보면 가치가 전혀 없어보이는데도, 발렌시아가라서 수요가 생기기 때문이다. 발렌시아가의 상호 때문에 제품의 가치가 올라가는 모습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모습은 럭셔리 패션의 고고한 경계를 더욱 굳건히 강조하는 듯하다.


하지만, 발렌시아가는 파리 스니커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럭셔리 패션도 이렇게 헤질 때까지 입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몇십만 원짜리 명품 신발도 결국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지며, 파리 스니커즈처럼 닳고 닳을 때까지 열심히 신으라는 뜻이다. 발렌시아가는 명품의 소장 가치가 아닌 효용 가치를 언급했다. 럭셔리 브랜드가 지향하는 고급화 전략은 어디 가고, ‘제품’이라는 상업적 정체성이 강조되었다. 이케아 쇼핑백과 비닐봉투 가방은 어떨까. 이들은 값 싸고 일상적인 물건으로, 럭셔리 패션과 아주 대조적인 소재다. 이 저렴한 모티프와 럭셔리 브랜드의 병치는, 명품이 고상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는 고정된 인상을 뒤집어버린다.


뎀나 바잘리아는 럭셔리 패션, 그 가치 판단의 기준을 뒤흔들었다. 럭셔리 패션의 전통적인 정의에 도전하고, 새로운 소구점을 제시했다. 발렌시아가 제품의 물리적 가치가 아니라, 아이디어에 주목하도록 한 것이다.


이제 럭셔리 패션을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본래 럭셔리 패션은 장인의 정교한 기술과 디자이너의 섬세한 디자인이 결합된 고품질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아이디어에 열광한다. 그 열광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브랜드의 홍보와 소비로 연결되는 것은 분명하다. 럭셔리 브랜드의 과감한 행보는 재미있고, 새로우며, 강렬하다. 찢어진 신발과 브랜드 로고, 그리고 엄청난 가격의 조합이라는 역설적인 이미지는 확실한 파장을 가져왔다.



뎀나 바잘리아는 럭셔리 패션의 보수적인 가치를 더 견고하게 만들면서도, 새로운 가치를 제시했다. 이 아이러니한 행보에 결국 이런 질문이 남는다. “명품이 도대체 뭐지?” 하지만 뎀나 바잘리아가 가져온 결과는 분명하다. 사람들은 파리 스니커즈를 보고 의아해 하고, 어이없어 하고, 욕도 하고, 재밌어했다. 그리고 대화했다. 럭셔리 패션의 정의, 경제적 불평등, 지나친 상업성 등등. 다양한 논의를 촉발시키고, 담론을 형성한 것이다. 자, 나는 이게 바로 럭셔리 패션의 가치라 생각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이 글은 단대신문 <패션으로 엿보는 세상> 코너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패션이 권력에 저항하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